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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독립’… 일제시대 모든 출판물에서 사라졌던 단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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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16년의 서대문형무소 전경. 사진 왼쪽 맨 끝에 독립문이 흡사 형무소 대문처럼서 있다. 1987년 서대문형무소가 폐쇄될 때까지 독립문 앞은 형무소 앞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문이 서대문형무소에 종속됐지만 지금은 관계가 역전돼 많은 사람이 서대문형무소를 독립운동가 전용 감옥이었던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사진=『한일병합사』]

일제강점기 활자 중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은 아마 ×자였을 것이다. 총독부 당국은 신문·잡지 등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모든 출판물의 글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감시했다. 아예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기사가 통째로 빠지기도 했으며, 문장 전체 또는 문단 전체가 ×자로 채워지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흔히 사용된 것은 ‘불온 단어’들을 ×자로 바꿔치는 방법이었다.

 ‘조선민족’ ‘민족해방’ 등 한국 민족의 독자성을 함축하거나 일본에 항거하는 뜻을 담은 단어는 물론 ‘폭압’ ‘학정(虐政)’ ‘민주주의’ 등 우회적으로라도 일본 통치를 비판하는 것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는 단어들은 예외 없이 ××로 대체되었다. 말할 나위 없이 가장 많이 ××로 대체된 단어는 ‘독립’이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날벼락 맞는다’는 속담대로, 사상·정신·운동 등의 단어도 독립 옆에 붙으면 여지없이 자기 자리를 ×자에게 내주어야 했다.

 ‘독립’은 일상의 언어생활에서도 금지된 단어였다. 일제 경찰은 다방이든 빨래터든 한국인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독립’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 형편에도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한글과 한자로 머리 앞뒤에 당당히 써붙인 채 버티고 선 건조물이 있었으니 바로 독립문이다.

 일제는 같은 무렵에 조성된 원구단과 기념비전은 각각 헐고 망가뜨렸으나 독립문만은 그대로 두었을 뿐만 아니라 초석에 균열이 생기자 보수하기까지 했다. 일제가 독립문을 특별대우한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추론은 이 문에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뜻도 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사’ 교과서는 일본의 한국 강점 경위에 대해 ‘조선은 일본이 승리한 덕에 청나라의 속국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했으나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와 낮은 민도(民度) 때문에 도저히 독립을 유지할 형편이 되지 못해 결국 일본에 합병되었다’’고 주장했다. 독립문은 이 주장의 증거물이었다.

 그런데 다른 이유도 있었던 듯하다. 항일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08년, 일제는 독립문 바로 뒤에 서대문형무소를 지었다. 사람은 인접한 것들을 묶어서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감옥에 인접한 독립문의 이미지는 ‘독립을 생각하면 감옥이 기다린다’는 정치적 메시지와 아주 잘 어울렸다.

 장소뿐 아니라 개념도 같이 붙어 있을 이유가 없는 것들이 공교롭게 달라붙어 엉뚱한 부작용을 낳는 일이 왕왕 있다. 자유·평화·인권·복지 등 보편적 가치를 지닌 개념들도 정치적 수사(修辭)에 너무 자주 동원되면 자칫 정파적 가치로 오인될 수 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