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기자의 푸드&메드] 인간을 위해서도 ‘동물복지’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4면

돼지들은 생애 처음으로 흙을 밟아보는 기쁨에 들떴다. 개보다 후각이 100배나 발달한 돼지들이 악취 가득한 돈사에서 빠져나와 상쾌한 바깥 공기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다. 그러나 환희는 잠깐, 돼지들은 구덩이 속으로 우르르 내몰렸다. 머리 위를 포클레인이 사정없이 내리쳤다. 돼지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에 한국동물보호연합 이원복 대표는 보름이나 환청에 시달렸다.

 이 대표는 구제역 살처분 현장에선 “동물을 죽이더라도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동물보호법이 일절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기간에 10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살처분·매몰해야 하는 전대미문의 사건 현장에서 모든 동물을 안락사시킬 여유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구제역· 조류 인플루엔자(AI) 파동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서 사육되는 소·돼지·닭·오리의 삶은 가혹하다. 국내에서도 1999년부터 ‘동물복지’ 운동이 시작됐지만 소·돼지·닭 등 식용(농장) 동물은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돼 있다.

  동물복지는 동물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는 동물권리운동의 대안으로 나왔다. 육류 생산 등 동물 이용 행위는 수용하되 행위의 주체인 사람에게 윤리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동물의 삶에 최소한의 편의를 제공하고, 고통을 최대한 줄여줘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선 가축의 사육·운송·도축 등 전 생애에 걸쳐 동물복지가 외면당하고 있다.

  동물복지의 주창자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좁은 사육 공간이다. 가로 60㎝, 세로 210㎝의 스톨(stall, 칸막이)에 갇힌 암퇘지가 누워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은 보기에도 애처롭다. A4 용지 한 장 크기의 배터리 케이지에선 암탉 두 마리가 평생 알만 낳는다.

  좁은 공간에서 동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돼지의 경우 자동 급여되는 사료를 먹고 축사 한 귀퉁이에 마련된 배설 장소로 이동해 용변을 본 뒤 돌아와 바닥에 엎드려 잠을 자는 것이 거의 전부다. 이런 단조로운 생활로 스트레스를 받은 동물은 대개 높은 공격성을 보인다. 코티솔 등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

 밀식으로 인한 축사 내 공기 오염과 스트레스는 동물을 각종 질병에 취약하게 만든다. 면역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밀폐 환경에서 생활하는) 닭이 AI에 걸리면 집단 폐사하지만 야생 철새가 AI 감염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한국동물복지협회 조희경 상임대표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밀식하면 구제역 등 동물 전염병의 전파 속도도 빨라진다. 1967년 영국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일부 지역에 한정됐다. 반면 밀식이 보편화된 2001년의 구제역은 단 2주 만에 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 전역에 확대됐다. 이 사건은 7개월간 600만 마리의 가축이 살처분되고서야 종료됐다.

  식품안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밀식이 육류·계란 등의 항생제 잔류 가능성을 높이는 간접 요인이기 때문이다. 사료 등에 항생제를 섞는 것은 면역력이 떨어진 동물의 폐사를 막고 체중을 빨리 늘리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물론 동물복지에 신경을 더 쓴다고 해서 가축 질병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동물복지와 공장식 축산의 장단점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됐다고 믿는다.

박태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