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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중동선수들, 경기서 지면 “신의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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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 축구에 중동은 넘어야 할 벽이다. 중동 축구는 한국과 물고 물리면서 아시아 정상을 공유해 왔다. 내년 1월 8일(한국시간) 카타르에서 개막하는 아시안컵에서 51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한국은 중동세를 넘지 않고는 우승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동 축구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리그 알힐랄에서 6개월간 뛰었던 설기현(포항·사진)에게서 중동 축구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축구에 미친 중동 국가들

 “모두가 축구에 미쳐서 살죠. 즐길거리라고는 축구뿐이니까요.” 익히 알려진 대로 사우디는 축구 열기가 대단한 나라다. 특히 그가 몸담았던 알힐랄은 사우디 최고의 인기 팀이다.

특이한 점은 관중 전부가 남자라는 것. 여성은 축구장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동 여성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은 아니다. 설기현은 “이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백화점에 갔는데 많은 여성팬이 알아보더라. 사진도 적극적으로 찍자고 했다. 아마 집에서 TV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우디에서는 자국 축구리그 경기는 물론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유럽 주요 리그의 경기를 대부분 생중계한다. 중계에 투입되는 인력도 상당하다. 설기현은 심판이 보지 않는 곳에서 파울을 했다가 낭패를 볼 뻔했다. 수십 대의 중계 카메라가 선수 한 명 한 명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비신사적인 반칙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는 당시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위기에 처했지만 외국 선수라는 특수성이 인정돼 징계를 면했다.

 #성패는 감독에 달려

 사우디 리그는 경기력에서도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남미 선수들 못지않은 개인기를 갖췄다. 그렇다면 최근 월드컵 지역예선과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고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설기현은 “선수들의 성격 탓인 것 같다”고 답했다. 그가 겪은 중동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낙천적이고 순박했다. 신앙심도 깊어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 문제는 바른생활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 설기현은 “경기 전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도를 한다. 그러나 막상 지고 나면 ‘패배 또한 신의 뜻이다’며 쉽게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중동의 클럽들은 대부분 강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하는 사령탑을 선호한다고 한다.

 #알힐랄 구단주는 사우디 왕족

 그가 뛴 사우디는 중동에서도 유독 폐쇄적인 나라다.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없고 술을 팔거나 마실 수도 없는 곳이다. 그래서 더욱 알려진 정보가 없다. 실력이 뛰어난 중동 선수들은 유럽 리그에서보다 많은 연봉을 받기 때문에 자국 리그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설기현은 “나도 그게 궁금해 직접 물어봤다. 유럽 리그에서 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선수나 그들이나 똑같다”고 했다.

 그들이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하지 못하는 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유럽에 진출하려면 해당 클럽의 스카우트나 에이전트가 자유롭게 나라를 드나들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 리그 최고급 선수를 테스트하기 위해 초청하더라도 나라 고위층에서 이적을 반대한다. 우수한 선수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알힐랄의 경우 사우디 왕족 압둘라만 빈 무사드가 구단주다. 자신의 궁 안에 세계의 유명 테마파크를 그대로 재현했을 정도의 재력가다. 초대를 받아 궁 안을 구경한 설기현은 “여러 명의 아내가 살고 있는데 각자 건물을 따로 소유하고 있다. 집이라기보다는 단지에 가깝다. 건물은 장식 덕분에 모두 금빛이었다”고 회상했다.

 #51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한국의 아시안컵 우승 가능성을 물었다. 설기현은 2000년과 2004년 아시안컵에 참가했지만 각각 사우디와 이란에 막혀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당시 우리는 중동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A선수가 이런 스타일을 갖고 있으니 우리는 이렇게 대응하자’는 식의 준비가 부족했다. 지금은 다르다. 이영표(사우디 알힐랄), 이정수(카타르 알사드), 조용형(카타르 알라얀) 등 주축 선수들이 중동에서 뛰고 있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중동팀을 상대한 경험도 붙었다.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며 한국의 우승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포항=이정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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