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대건설 MOU 가처분 소송 ‘스타 변호사들의 격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매매대금 지불이 이뤄지는지 지켜본 뒤 협상대상자를 바꾸자는 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지난 2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 중법정. 현대건설 인수 양해각서(MOU) 해지 금지 가처분 사건 두 번째 재판에서 법무법인 태평양의 노영보(56) 대표변호사가 변론에 나섰다. 태평양은 현대건설 주주협의회(채권단)를 대리하고 있다. 전세가 불리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지면서 대표변호사가 직접 ‘등판’한 것이다.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주주협의회·현대그룹·현대차 간 다툼이 국내 대형 로펌들의 자존심 대결로 번지고 있다. 5조원이 넘는 소송 규모와 함께 사회적 관심이 역대 어느 인수합병(M&A) 건보다 높다는 부담 속에서 각 로펌이 해당 분야의 스타 변호사를 내세워 ‘재판 삼국지’에 돌입한 것이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태평양의 노영보 대표는 24일 3시간이 넘게 진행된 재판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주주협의회 대리인 자격으로 첫 발언과 마무리 발언을 맡으면서 분위기를 이끌었다. “MOU에 향후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특약이 있기 때문에 법정 다툼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또 ‘매매대금 지불이 실제로 이뤄지는지 기다려 본 뒤 우선협상대상자를 바꿔도 된다’는 현대그룹 주장에 대해서도 “상황이 바뀐다면 현대차가 기존에 제시했던 5조1000억원을 낸다는 보장이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노 대표가 직접 나선 것은 이번 가처분 소송의 중요성 때문이다. 주주협의회는 현대그룹이 인수대금 조달 방법으로 제시한 프랑스 나티시스은행 예금 1조2000억원을 놓고 의혹이 제기되자 법무법인 광장을 대리인으로 추가 선임했다. 광장 측은 문호준(39·사법시험 37회) 변호사를 주축으로 한 M&A팀의 대우건설·외환은행 M&A 처리 경력을 내세워 수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존심을 구긴 태평양은 결국 대표변호사의 현장 지휘라는 카드를 던졌다. 노 대표는 판사 시절 엘리트 법조인 모임으로 알려진 ‘민사판례연구회’ 회원으로 법원행정처 법정국장 등 법원 내 요직을 거쳤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국장의 변호인을 맡아 지난 10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냉철하게 법리를 따지는 변론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에 맞서 현대그룹 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바른의 박철(51) 변호사는 이번 재판에서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현대그룹=약자, 현대차·주주협의회=강자’의 구도로 정리한다. 22일 재판에서 그는 고대 수메르 법전을 인용해 “약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법이라는 소박한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강조했다. 재판 과정에서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 하종선 사장이 ‘골리앗 대 다윗(현대그룹)의 싸움’으로 표현한 것도 박 변호사의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후문이다. 박 변호사는 판사 시절 판결문장론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2004년 친족 강간 혐의로 구속기소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그는 다산 정약용의 『흠흠신서(欽欽新書)』 구절을 판결문에 넣었다. 피고인이 혐의를 부인하는 데 대해 “‘백 명의 죄인을 석방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법언에서 쉽게 도피처를 찾는다면 어찌 형벌을 다루는 법관이 흠흠(삼가고 또 삼가는 것)하기를 다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2006년 임대주택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70대 노인의 건물 명도 소송 판결문에서는 “원고(대한주택공사)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고 했다. 올해 2월 법복을 벗은 뒤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기소된 한나라당 박진 의원의 변호인으로 나서 1심을 뒤집고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지난 9월 현대그룹이 “신규 여신 중단과 채권 회수 등 공동 제재를 풀어 달라”며 채권단을 상대로 낸 가처분 사건에서 승소 결정을 받아내면서 현대그룹의 신뢰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측 대리인인 김&장의 백창훈(53) 변호사는 직설적인 언어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스타일이다. 그는 재판에서 파워포인트를 통해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보도됐던 ‘벤 존슨 약물 복용 금 박탈’ 기사를 제시했다. “벤 존슨이 약물 복용으로 남자 100m 달리기 부문 금메달을 박탈당했던 것처럼 현대그룹이 트릭을 써서 입찰한 것이기 때문에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직된 법정에 잠시 웃음이 돌았다. 백 변호사는 환 헤지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 계약의 불공정성을 다투는 재판에서 은행 측 변론을 맡아 약 100건에 달하는 사건에서 무더기 승소를 이끌어 낸 바 있다. 우선협상대상자가 현대그룹으로 결정되면서 한때 사기가 꺾였던 김&장은 이번 가처분 사건을 통해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있다.

 법무법인 화우는 현대그룹의 대리인으로 M&A 법률 자문을 맡고 있다. 프라임그룹의 동아건설 인수 과정에 참여한 신영수·신영재 부부 변호사를 내세워 현대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우선협상대상자 자격 박탈 뒤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다.

최선욱 기자

▶ 2010 중앙일보 올해의 뉴스, 인물 투표하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