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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4) “스탈린이 죽었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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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대한민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한국을 떠나기 전 서울대로부터 1953년 1월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서울대는 부산에 피란 중이었다. 수여식을 마친 뒤 참석한 요인들이 함께 촬영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밴플리트 장군, 맨 왼쪽이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 제공]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그는 이 회고록에서 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했던 인물이다. 그는 전쟁으로 국난(國難)을 당하고 있던 당시의 대한민국으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워싱턴 정가에서 늘 ‘과도한 탄약 소모량’을 지적할 정도로 아낌없는 화력 지원으로 국군의 후방을 지탱한 장군이다. 한국군 증강 계획에는 대한민국 정부 인사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섰고, 1952년 내가 2군단을 이끌고 있던 무렵에는 체계적인 국군 포병 양성을 주도적으로 지원했다. 이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방한할 것에 대비해 나로 하여금 국군 증강계획을 면밀하게 짜도록 준비를 시키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을 떠나게 됐다. 그 후임자는 맥스웰 테일러 중장이었다. 처음 한국에 부임하는 그의 성격이 어떨지는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한국과 미국의 관계 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밴플리트 장군의 역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해서는 우려가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밴플리트는 그해 2월 한국을 떠나 군에서 은퇴했다. 그가 기울인 노력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부산 피란 시절의 서울대학교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의 서울대학교는 그럴 듯한 장소를 마련하지 못했다. 전쟁을 하고 있던 당시의 대한민국이 앓는 아픔을 함께 겪고 있었던 것이다. 밴플리트 장군의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은 그래서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의 강당에서 열렸다. 행사는 정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서울대학교는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해 1년9개월여 동안 물심양면으로 한국을 도운 밴플리트 장군에게 심심한 감사의 표시를 했다.

맥스웰 테일러(1901~87)

 그는 한국을 떠난 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미국 플로리다주 포크시 교외의 농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만년(晩年)에 한·미재단과 코리아소사이어티를 창설해 한국과 미국의 우호 증진에 끝까지 열성을 보였다. 코리아소사이어티는 그의 공적을 기려 밴플리트상을 제정해 해마다 한국과 미국의 우호 증진에 힘쓴 사람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2010년에는 내가 그 상을 받았다. 미국을 방문해 코리아소사이어티의 밴플리트상을 수상하면서 나는 그 진중하면서도 한국을 후원하는 데 다른 어느 누구보다 깊은 열정을 보였던 이 ‘거인(巨人)’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공수사단장 출신인 맥스웰 테일러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성격이 강직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룩셈부르크 작전을 두루 경험한 제2차 세계대전의 용장(勇將)이다. 그는 앞에서도 잠시 소개했듯이 모두 7개 국어를 구사하는 명민(明敏)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일본과 일본사람을 좋아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 두루 근무했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결국 일본에 대해 강한 호감(好感)을 품었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런 성향 때문에 그는 부임 뒤 한국군 장성 리스트를 일일이 훑어보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이형근 장군에게 상당한 관심을 뒀다고 한다. 그가 이끄는 미 8군의 최상급 파트너를 물색했다는 것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나보다는, 자신의 뇌리에 ‘일본 최고 엘리트 양성소’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일본 육사 출신을 선호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중에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밴플리트에 버금가는 나의 파트너가 됐다. 결국에는 나와 한국군 증강 계획을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 최고 협력자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전선에만 서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무관(武官)으로 근무하는 등 전선 지휘관 외의 경력이 다채로운 편이었다. 그가 일본어를 비롯해 7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도 그런 다양한 경력으로 인해 생긴 측면이 있었다. 그는 따라서 단순한 야전 지휘관이 아닌, 일종의 군정(軍政)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경력의 테일러가 부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한국전쟁의 휴전을 앞당기기 위해 그에 알맞은 8군 사령관을 선임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전쟁이 발발한 지 햇수로 이제 4년째, 만으로 2년 반을 훌쩍 넘어선 시점이었다.

 전선에서는 고지전이 계속 이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휴전협상이 벌어지는 형국이었다. 공산 측은 나름대로 휴전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에 대해 치밀한 계산을 하는 눈치였다. 아군 측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줄곧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미국과 유엔 참전국은 나름대로 휴전협정 마무리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 공산 측이 오랜 계산을 마침내 끝내고 휴전협상 테이블에 적극 나오는 계기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않게 다가왔다. 나는 그런 전기(轉機)를 바다 위에서 맞이했다. 53년 3월 5일 나는 동해 원산의 앞바다에 가 있었다. 미 7함대 사령관인 조셉 클라크 제독이 나를 자신의 함대 전함인 미주리함으로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 7함대가 원산 앞바다까지 진출해 북한 지역을 함포로 사격하는 장면을 시찰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이 함께 승선했다. 52년 가을에도 나는 미 7함대의 전함 뉴저지함에 승선해 원산까지 올라간 일이 있었다. 당시 미군은 원산 앞바다의 여도(麗島)라는 섬에 상륙해 해병 진지를 구축할 정도로 북한을 옥죄고 있었다. 나는 여도에 올라 미 전함이 원산을 함포로 때리는 장면을 봤다.

 53년 3월에도 그런 시찰을 나갔던 것이다. 우리가 미주리함에 올라타 원산 앞바다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함포 사격을 설명하던 클라크 함대 사령관이 어떤 쪽지인가를 받아들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막 도착한 최신 뉴스입니다. 오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죽었습니다.” 한국에서 전쟁을 도발한 막후 최고 지휘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죽음. 휴전협상이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계기는 그렇게 느닷없이 다가왔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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