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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질방 스트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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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

지난달 23일 연평도에 포격이 있고 난 후 주민들은 인천의 한 찜질방에서 피란 생활을 시작했다. 며칠이면 될 줄 알았던 것이 길어져서 이제야 인근 지역의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 주민들이 겪은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뉴스를 통해 주민들의 생활을 볼 때마다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개인공간이 확보되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넓은 찜질방 공간에서 수백 명의 주민이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낮에는 자원봉사자와 찾아온 친인척들까지 천 명 가까운 인원이 찜질방 안에 함께 있었다고 하니, 공간 대비 밀도가 매우 높았을 것은 분명하다.

 몇 년 전 설 연휴에 있었던 일이다. 신정을 치르기 때문에 휴일로 사용해서 나흘 가까이 집에 있게 되었다. 처음 이틀은 푹 쉰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사흘이 넘어가며 나와 아내의 집안에서의 행동반경이 묘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아내는 방에 들어가 있고, 아내가 나오면 이번에는 내가 다른 방으로 가서 컴퓨터를 켜는 것이었다. 오래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미묘하게 집안의 공기 밀도가 올라가서 긴장도가 느껴져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개인공간을 확보해 숨통을 틔우기 위한 본능적 행동을 한 것이다. 물론 둘이 냉랭한 상태인 것도 아니었다.

 남성들이 화장실에 가면 소변기를 선택할 때, 식당에서 테이블을 고를 때에도 구석부터 순서대로 하지 않는다. 최대한 개별 공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선택한다. 지하철에서도 맨 가장자리가 명당이고, 다른 빈자리가 있는데도 누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면 불편한 것도 개인공간을 유지하고픈 욕구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하고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위협받고 있다고 여겨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찜질방이란 공간은 프라이버시를 확보해줄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삶의 터전에서 떨어져 나와 정신적으로 불안한데, 어느 방향에서 어느 순간에도 누가 나를 지켜볼 수 있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있었다. 거기다 하루 종일 들리는 소음도 보통이 아니고, 전등을 켜고 끄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가 한 달 가까이 지속되었다.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아마 소소한 갈등이 꽤 있었으리라. 황소 힘줄같이 무던한 사람이라도 지칠 만한 환경이니 말이다.

 이제 정상적인 주거공간으로 이주가 시작되어 이 문제는 일단락이 났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부분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연수원같이 몇 명 단위로라도 남 눈치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 단위의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먹고 자는 것을 확보해주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삶의 질을 유지할 개인공간을 확보해 주는 것도 이제는 그만큼 중요한 일로 여겨져야 할 때다. 우리나라는 G20 의장국이었다. 그 정도 수준은 돼야 하지 않을까.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