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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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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
(사)바른금융재정포럼 이사장

“내년에 아시아 국가들에 있어서 최악의 직업을 꼽는다면 ‘중앙은행 총재’라는 직업일 것이다.” 최근 미국 경제잡지인 비즈니스위크가 한 경제전문가의 코멘트를 인용하여 표현한 내용이다. 실제로 내년도 경제정책 특히 금융 관련 정책의 집행은 엄청나게 까다로워질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해 있다.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자유로운 자본 이동, 독립적 통화정책, 환율안정성 내지 고정환율제, 이 세 가지 조건은 한꺼번에 달성될 수는 없다. 이 명제에는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삼중(三重) 딜레마(trilemma)라고도 부른다. 예를 들어 보자. 인플레를 우려하여 금리를 올리면(독립적 통화 정책) 해외자본이 유입되는데(자본 이동 자유), 이 경우 유입된 자본이 국내 채권 투자를 하느라 국내 통화를 사들이게 되므로 이 과정에서 국내 통화는 절상이 되고 환율안정성은 깨지게 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걱정스러운 조짐이 최근 국내 금융시장에 나타나고 있다. 국내 채권시장에서 외국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보유 국내 채권 규모가 무려 80조원대에 이르렀다. 전체 채권의 약 7.1%에 달하고 있고, 국고채만 따로 떼어보면 전체 규모의 15%가량을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다. 올해 들어 21조원이 채권시장에 유입됐고 11월에만 5조원이 채권 매수를 위해 추가로 유입됐다. 우리 국채를 사들이는 매수자가 많으면 일단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들 자금이 상당 부분 핫머니적 성격이 크다는 점이다. 슬로머니(slow money)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장기에 걸쳐 신중한 투자를 하는 자금인 반면 핫머니(hot money)는 단기성 투기자금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차익을 노리는 돈이라서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그런데 이들 핫머니가 노리는 것은 우리 국채 자체가 아니라 원화절상이다. 이들은 원화채권을 통해 채권금리에다 원화가치절상률만큼 추가이익으로 챙길 수 있으므로 원화절상을 예상하면서 빠른 속도로 우리 채권을 매입하는 중이다(이 중에는 차이나 머니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원화 강세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이들 자금이 급속히 빠져나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거의 800억 달러 수준에 이르는 이들 자금이 한꺼번에 탈출한다고 할 때 이는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의 30% 가까운 규모이므로 상당한 문제를 유발시킬 수 있다. 2008년의 경우 리먼 사태가 발생한 9월부터 연말까지 약 700억 달러가 빠져나갔는데 당시 원화환율이 급등하는 등 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렸었고 결국 우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면서 겨우 안정을 되찾은 일이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이들 자금의 일시적 탈출이 가진 잠재적 위력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지난달 11일 도이치 증권을 통해 집행된 2조원 가까운 차익거래 청산 매물은 10분 사이에 주가지수를 50포인트 이상 끌어내리면서 만기일을 맞은 옵션시장을 초토화시켰다. 이처럼 차익거래 포지션이 한꺼번에 정리된 이유가, G20 회의가 끝나면서 원화 강세가 마무리될 것 같다는 예상에 근거하여 원화이익을 조기 실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약 170억 달러의 주식매물이 세계 제일의 거래량을 자랑하는 우리 옵션 시장을 단숨에 무력화시킬 정도이니 안심할 수가 없다. 최근 정부는 의원입법을 통해 외국인 국내 채권투자에 대한 세금을 재도입하는 방안과 은행세 도입 방안을 확정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치들의 시행에도 탄력세율을 포함해 규제 강도의 강약 여부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다양하면서도 강력한 후속 조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다행인 것은 G20 정상회의를 통해 외국자본의 유입을 견제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또한 G20 회의 이후 신흥시장국들의 금융규제에 관한 어젠다를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상황도 도래했다. 우리 혼자 해외자본에 대해 강한 규제를 하면 외국자본에 의해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지만 신흥국 전반에 걸쳐 자본 유출입 규제 분위기를 만들면 해외자본의 눈치를 볼 필요성이 크게 줄어든다.

 어지러울 것으로 보이는 경제상황 아래서 국제적 어젠다 설정의 힘을 조화롭고 슬기롭게 이용함으로써 정책 시행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순작용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 (사) 바른금융재정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