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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5년 만에 ‘실버 재가 서비스’ 창업한 육홍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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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딸만 겨우 데리고 북한을 빠져나온 엄마에게 한국 사회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식당일, 미싱일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삶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렇게 살아선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노인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전망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더 전문적인 서비스를 해 보겠다는 목표로 전 재산 500만원을 털어 실버 재가(在家) 서비스 회사를 차렸다. 사장 1명뿐이던 회사는 1년 만에 직원 50여 명에 연 매출 4억원을 올리는 회사로 커졌다. 탈북한 지 5년 만에 중견 기업 사장으로 우뚝 선 육홍숙(45·여)씨는 이제 ‘토털 실버 서비스’ 기업을 꿈꾸고 있다. 집에서 또는 시설에서 맞춤형 요양 서비스를 해 주는 회사가 목표다. 세종창업연구소 이인호 소장이 육씨의 성공 비결 및 향후 전략에 대해 분석했다.

식당 → 미싱사 거쳐 요양보호사로

양문재가파견센터 육홍숙 사장이 고객의 집을 방문해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새터민인 그는 한국에 온지 5년 만에 직원 50여 명을 거느린 사장이 됐다. 성공 비결을 묻자 “자식 같은 마음으로 헌신하는 서비스”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육씨는 1999년 당시 9살짜리 딸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다. 딸에게까지 배고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중국에 머물고 있던 2001년, 탈북 사실이 적발돼 북송됐다. 한 번 북한을 벗어나려 했다는 낙인이 찍히자 삶은 이전보다 더 힘들어졌다. 2005년 말 ‘굶어 죽든 잡혀서 죽든 죽긴 매한가지’란 생각으로 다시 두만강을 건넜고, 이번에는 성공했다.

 새터민들을 대상으로 한국 사회 적응 교육을 하는 하나원을 수료한 게 2006년 5월. 대부분의 새터민처럼 육씨도 처음에는 식당일부터 뛰어들었다. 딸과 함께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저축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미싱사 일이었다. 기능직이다 보니 식당일보다는 대우가 나아졌지만, 육씨는 자꾸 딸의 미래가 눈에 밟혔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우리 가족의 미래가 암울하겠다 싶어 뒤늦게나마 새로운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육씨는 북한 함경도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도자기 공예가 전공이었다. 덕분에 일정 점수 이상의 학점만 취득하면 한국에서 다시 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사이버 대학에 등록해 미싱사로 일하는 틈틈이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2008년 사회복지학 학위를 얻었다.

 2008년 10월부터 육씨는 노인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재가 서비스’, 즉 몸이 불편한 노인의 집을 직접 방문해 집안일을 거들고 목욕하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요양 시설에 갈 형편이 안 되거나 가기를 원하지 않는 노인들이 대상이다. 노인 한 사람당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5일, 하루에 4시간씩 서비스를 한다. 노인들이 지불하는 금액은 정부에서 지정하는 ‘장기요양 인정 등급’에 따라 달라진다. 3등급은 매달 81만원, 1등급은 113만원이다. 기초 수급자인 경우 100% 정부 지원이 이뤄지며, 일반인은 본인 부담금이 15%고 나머지를 정부가 지원한다. 요양보호사의 수익도 서비스 대상자의 등급 및 일하는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매달 최하 80여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 이상 벌 수도 있다.

 육씨는 특히 고객들에게 인기가 좋은 요양보호사였다. 노인들의 말을 성의 있게 잘 들어준 게 비결이었다. 그는 “요양보호사 일을 하기 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북한 이탈주민 종합 상담센터에서 상담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배운 것들이 노인들과 대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500만원으로 창업 … 한달 수익 800여만원

고객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개인 요양보호사로 머물다 말 게 아니라 아예 회사를 차려 보자’는 결심을 했다. 직접 현장에서 노인들을 만나면서 관련 시장의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 점도 작용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서비스 대상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특히 시설이 아닌 집에서 지내면서 서비스를 받으려 하는 노인이 많아서다. 현장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한 지 1년여 만인 지난해 11월, 육씨는 그때까지 모은 전 재산 500만원을 털어 서울 공릉동에 23㎡(약 7평)짜리 쪽방을 얻어 ‘양문 재가 파견센터’를 차렸다. 당시만 해도 육씨 자신이 사장인 동시에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는 “아무도 몰라주는 1인 기업이지만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요양보호사를 한두 명씩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육씨가 가장 강조한 건 ‘헌신’이었다. 그는 “요양보호사 일은 돈만 생각한다면 절대 못할 일”이라며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몸이 불편해 힘들어하는 노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 해 드리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좋은 요양보호사”라고 말했다.

 육씨의 회사는 점차 주변에 ‘기계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자식들처럼 잘 돌봐준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직원 대부분이 새터민이었지만, 지금은 새터민이 아닌 직원도 많이 늘어났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나면 육씨에게 돌아오는 돈은 한 달에 800여만원. 북한을 빠져나온 직후와 비교하면 생활이 몰라보게 나아졌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육씨는 “재가 서비스는 법적으로 하루에 최대 4시간만 받을 수 있도록 제한돼 있는데, 노인들 중엔 그 이상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며 “재가 서비스와 시설 서비스가 결합된 토털 실버 서비스로 발전시키려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노인 요양보호 사업 성공하려면

· ‘자식 같은 서비스’로 승부하라.
· 24시간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디지털 장비를 활용하라.
· 요양사 파견 및 시설 서비스를 응용하라.
· 꾸준한 직원 재교육을 통해 전문성을 기르라.
· 지역 주민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라.

※자료=세종창업연구소

글=김진경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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