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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33)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밝은 눈 13

어쨌든 얼굴을 쳐들고 그를 다시 건너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고 느꼈다. 샹그리라에서 만나도 될 것인데 구태여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연유가 따로 있을 터였다. 세지봉 암벽에서 실족해 죽었다고 신문기사에 오른 502호실 땅딸한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언뜻 스쳐 지났다. 기사에서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세지봉이라고 했다. 세지봉이 아니야, 라고 내 속에서 누가 말했다. 위험한 생각이었다. 나는 그래서 짐짓 그 생각을 무시했다. 그나저나 그는 왜 하필 나를 이곳으로 불렀을까.
“알겠네!”
시험이 끝났다는 말투였다.

나의 빈 잔에 그가 다시 차를 채우고 있었다. 솔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나는 부복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따르는 그의 손을 보았다. 손등에서 검푸른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 게 아주 다이내믹해 보였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손이었다. 그렇게 크고 다부진 손은 처음 보았다. 주먹을 쥔다면 가히 강력한 해머가 될 듯했다. 누구든지 그 손아귀에 붙잡히면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쁜 기억이야 뭐 잊고 살면 더 좋을지 모르지.”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심드렁해졌다.
“상처로 봐선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남은 게 틀림없네. 그냥 자네한테 친밀감이 들어 물어봤어. 이유 없는 친밀감이란, 코드가 맞는다는 뜻일 테지. 이를테면 헛, 함께 역사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뭐 그런. 요즘은 성형수술이 발달해서 원한다면 얼굴도 고칠 수 있어. 때가 오면 내 도와주지. 나하고 오래 함께 지내보세. 관리인이라고 해봤자 낮엔 별로 할 일 없을 테니, 내일부터 낮에는 여기 와 있게. 자네를 그래서 불렀네. 월급도 좀 올려줌세.”
“이, 이곳에 말입니까?”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시선은 창 너머로 가 있었다.
좀 전의 광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무심한 눈빛이었다. 뭐랄까, 탈속한 고승의 눈빛을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진여(眞如)란 지극히 고요하고 지극히 밝으며’라고 말하던 순간의 그가 떠올랐다. ‘관음(觀音)은 하늘의 소리이니 마음으로 들어야 들리는 겁니다’라는 말이 더불어 들렸다. 소녀의 흰 드레스를 찢어 내리던 격렬한 그의 모습도 어른어른했다. ‘마음자리의 얼룩’을 닦아야 비로소 관음을 들을 수 있다 했으니, 그의 영혼은 하늘이 내리는 자비로운 관음을 이미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솔바람 소리가 은은해졌다. 새떼가 솔숲 뒤로 연이어 비상해가고 있는 게 얼핏 눈에 들어왔다.
“왜, 싫은가?”
“싫다니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예서 할 일은 백주사가 다 일러줄 걸세.”
백주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가 말의 아퀴를 지었다.

백주사가 먼저 알아듣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맞잡은 채 뒷걸음질 쳐 방을 나왔다. 외경감 때문에 경망스럽게 뒤돌아서 등을 보일 수 없었다.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를 어디서 보았던가, 하고 잠깐 생각했다. 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기시감을 느낀다고 해서 나에게도 그런 기분이 전이된 모양이었다. 한옥 추녀에는 ‘명안전(明眼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아주 우아하고 품격 있는 전각이었다. 눈이 밝아지는 전각이란 뜻이었다. 창을 통해서도 모든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전라도 어디에 있는 종갓집 사랑채를 그대로 뜯어다가 옮겨 놓은 전각이라고 백주사가 설명해주었다.

아침 열시가 조금 넘었으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이 정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식원 건물 안에만 해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느 건물에선가 인기척이 들리기도 했고, 어디에선가 라디오 소리도 흘러나왔다. 백주사가 경사로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나는 백주사의 등만 보고 따라 걸었다. 돌아보면 창가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검투사 이사장의 눈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창 안쪽에 서 있을지라도 모든 건물의 내부까지 손금처럼 내려다볼 사람이었다. 백주사가 단식원 건물에 딸린 한 방으로 들어갔다. 백주사가 쓰는 사무실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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