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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3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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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밝은 눈 12

“절이 아닌가요?”
“헛. 절이지. 그러나 또 절이 아니네. 어리석은 자들은 부처를 모셔야 절인 줄 알아. 나는 그런 거 안 모시네. 석가모니불, 다 돌덩어리일 뿐이야. 어떤 성자가 이르길 ‘네 몸이 신들로 가득 찬 너의 사원’이라 했어. 뿐인가. 요한계시록에도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다고 했네. 자네 몸 안에 절이 천 개, 교회가 만 개는 들어 있다 그 말일세. 이해하겠는가.”
“…….”

나는 물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절이면서 절이 아니라는 말도 그렇고 석가모니불이 돌덩어리라는 말도 그랬다. ‘명안진사’라 했으면 절이지 왜 절이 아니란 말인가. 더구나 단식원 옆으로는 단청도 훌륭한 ‘명안진각’도 있지 않은가. 문이 잠겨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으나 명안진각은 분명히 대웅전에 해당됐다. 지금 검투사 이사장이 앉아 있는 이 전각으로 말하자면 산신각쯤에 해당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절이라면 절이고 그가 절이 아니라면 절이 아닐 것이었다. 그 점은 틀림없었다. 절간에 가서도 눈치 있으면 새우젓이라도 얻어먹는다 했다. 나는 그래서 부복하다시피 하고 가만히 있었다.

“나를 똑바로 보게나!”
부복한 나를 향해 그가 잠시 후 일렀다.
낮지만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백주사는 나와 비스듬히 앉아 나를 내내 살펴보고 있었다. 솔숲을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아스라했다. 나는 일부러 머뭇머뭇 당황한 척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찾았다. 그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화하면서 온화하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이 나의 머릿속을 더듬고 나의 갈비뼈를 통과해 오장육부에 닿는 것 같았다.

“혹시 샹그리라 오기 전, 날 본 적 있었는가?”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는 ‘얼룩’이었다. 나를 향해 건너오는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어떤 광채가 서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눈으로 표창을 쏘는 듯했다. 솔바람 쑤와아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나를 향해 살의어린 표창이 무수히 날아오는 소리였다. 그의 눈빛을 피해 나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 아뇨.”
더듬으면서 내가 대답했다.

“……처음 뵈었는데 거둬주시어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첫눈에 나는 자네가 심지 곧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았네. 자네 같은 사람은 배신이 없어. 낯이 익은 것도 같았고. 거 왜 기시감이라는 말 있잖나. 어디서 본 듯한 느낌. 샹그리라엔 어떻게 왔었는가. 예서 살거나 한 적은 없었고?”
“그, 그게, 그러니까…….”
말을 더듬었으나 머릿속은 분주했다.

“기억이 잘…… 일종의 기억상실증에 걸렸나 봐요. 노숙자로 떠돈 최근 몇 년의 일을 빼곤 아무 기억이 안 나서요. 어쩌다가 오, 오게 됐는데요, 왜 오게 됐는지는 통…….”
“기억상실증이라…… 어쩌면 이 부근을 언젠가 스쳐 지났던 모양일세그려. 얼굴은, 어디서 그리 되었나?”
“그것도 확실히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화상일 거라 해서…….”
“화상이 틀림없어. 쯧, 화상을 입을 때 기억도 불탄 게로군.”
그가 짓고 있는 무심한 표정과 말투는 가면이었다.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나 나의 감각들은 시시각각 그가 보내는 신호들을 예민하게 수신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나도 그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처음 만나던 날에는 없었던 느낌이었다. 대머리에다가 남은 머리도 삭발을 해서 그렇지, 아무래도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얼굴이 불탈 때 기억의 일부도 함께 타버렸으며, 시시때때 얻어맞고 떠돌다가 남은 기억의 더 많은 부분까지 잃었던 게 사실인 것 같았다. 잊고 싶은 절박한 욕망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여린’이라는 이름조차 여기 와서야 비로소 생각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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