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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무역적자 확대 세계경제에 불안한 그림자

중앙일보

입력

1년 전 자본주의의 부작용으로 전세계가 대혼란에 빠진 듯했다. 러시아 통화의 평가절하와 채무 불이행은 세계의 자신감을 뒤흔들었다. 시장경제를 통한 세계번영으로의 여정(旅程)은 갑자기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향한 강제행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옛날 이야기다. 아시아는 다시 일어섰고 유럽은 걸음을 빨리하고 있다. 미국도 여전히 세계경제를 선도하고 있다. 세계번영이라는 목표는 또다시 실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한 가지 세부사항만 해결하면 된다. 문제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느냐는 것이다.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지난 9월 말 로렌스 서머스 美 재무장관의 발언을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서머스는 러시아의 부정자금 세탁과 자본도피에 관한 美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 증언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러시아의 경제개혁을 원하는 미국인들의 마음이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 국민들의 염원보다 클 수는 없다.” 그러나 실상은 美 정부(독일과 일본도 마찬가지다)의 많은 사람이 러시아 국민 이상으로 개혁에 열을 올리고 있다. ‘러시아는 왜 좀더 미국을 닮지 못하는가’하는 심정이다.

지난주 세계 각국의 금융 지도자들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합동 연차총회 참석차 워싱턴에 모였다. 그들의 눈길은 러시아의 경제개혁에만 멈추지 않고 러시아 못지 않은 부패로 큰 타격을 받은 인도네시아 금융체제의 재정립과 최근 경기회복으로 다소 느슨해지고 있는 듯한 한국의 경제개혁 지속에도 향하고 있다.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세계 3대 경제권인 미국·일본·유럽 간의 균형 달성이다.

미국의 무역적자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지금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은 마지막 과제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간 미국은 무역적자를 허용함으로써 약화된 세계경제를 지탱해 왔다. 그리고 세계 각국은 대미(對美) 투자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메웠다. 그러나 이제 유럽과 일본의 경제(그리고 금융시장)가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대미 투자자금을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달러화가 하락하고 덩달아 미국의 주가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소비붐을 떠받쳐온 것은 바로 高주가였다. 결국 선순환이 악순환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경제 전문가들은 여전히 지난 통화위기의 교훈을 둘러싸고 왈가왈부하고 있다. 미국의 유력한 싱크탱크인 외교관계 위원회는 지난 9월 초 ‘글로벌 금융체제의 번영을 지키기 위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저명한 학자·금융인·정책입안자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 작성한 것이다. 팀을 이끈 모리스 골드스타인 국제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에 따르면 그 내용은 “금융 초고속도로의교통규칙”이다. 그 보고서에는 신흥 개도국은 과세(課稅)로 자본유입을 통제해야 하며 페그제(환율을 주요통화에 연동시키는 제도)를 도입하면 안된다는 제안이 들어 있다. 또 IMF의 융자를 축소하고 개도국의 문제 해결을 위해 민간자본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신흥 개도국은 여전히 엄청난 자본부족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자본유입을 제한하는 것 등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민간부문의 부담 확대라는 제언은 당장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미의 소국 에콰도르가 브래디채권에 대한 채무 불이행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브래디채권은 80년대 중남미 부채위기 후의 은행채권을 증권화한 것으로 지금까지 채무 불이행의 전례가 없다).

브래디채의 산파 역할을 했던 니컬러스 브래디 당시 美 재무장관은 IMF가 에콰도르 정부에 채무 불이행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런 일이 없다고 강경 부인했다. 그러나 미국 유수의 증권회사 살로먼 스미스 바니의 신흥시장 조사책임자 데즈먼드 래크먼에 따르면 민간부문은 당국이 규정을 자꾸 바꾸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에콰도르의 채무 불이행도 지난 9월 말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일어난 소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하비비 정권을 둘러싼 부정 의혹이다. 대다수 인도네시아 국민은 동티모르 문제에는 오히려 관심이 적다. 그 의혹이란 발리은행에 수혈할 예정이던 공적자금 6천8백만 달러가 정권 실세들에게 흘러 들어갔다는 것이다. IMF는 인도네시아 정부에 전면 조사를 요구하는 한편 원조자금의 지급을 중단했다. 문제가 정치쟁점화되면서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고, 게다가 군부가 엄격한 새 치안법을 추진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결국에는 군부가 물러섰지만 학생과 당국의 충돌로 학생 5명,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의 앞날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패가 치유되려면 우선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 이어 스캔들이 터지고 그 후에 개혁이 따르는 것이다. 1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일본의 경우가 그런 것 같다. 일본에서는 3년 전 대장성(大藏省)이 은행의 부실채권 증대를 방임한 데 대한 불만으로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오늘날 대장성은 크게 힘을 잃은 반면 일본은행은 美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나 유럽중앙은행(ECB)과 같은 독립성을 갖게 됐다.

일본은행은 지난 9월 말 대장성 등 외부의 의향과는 관계 없이 엔화의 상승을 저지하기 위한 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아울러 일본에는 금융감독청이라는 국제적으로도 명성 높은 강력한 감독기관이 있다. 그리고 일단의 활기찬 기업인들이 이달에 다음 단계의 금융개혁이 시작되는 것과 발맞춰 일본 금융계에 인터넷과 전자상거래를 도입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아시아의 경제위기로부터 배우고 있는 교훈은 ‘세부사항의 중요성’이다. 외교관계위원회의 프로젝트 팀을 이끌었던 골드스타인은 “과거에는 거시경제 분야만 제대로 세워놓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균형재정과 활발한 민간부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금융체제, 실제의 징세(徵稅)로 연결되는 세제(稅制) 등도 필요하다.

덧붙여 각국이 그런 세부사항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국제적 인식도 필요하다. 외교관계위원회의 프로젝트 팀이 IMF에 융자대상국의 평가보고서를 발표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선진 각국의 금융당국은 자국 은행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자기자본 기준을 요구함으로써 고위험 국가에 대한 융자를 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보다 나은 세계질서’는 훌륭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애석하게도 불황에 허덕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그렇게 되기 글렀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흥시장 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들은 ‘미국債 금리 플러스 3%’의 금리로 차입이 가능했다. 어처구니 없이 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현재의 가산금리 11%가 타당한가. 살로먼 스미스 바니의 래크먼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에콰도르가 채무 불이행에 빠지면 금리는 더 오를 것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美 증시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9월 말 발표된 미국의 7월 무역적자는 2백50억 달러다. 그것이 발표되자 달러 시세는 1백4.1엔까지 하락했고 동시에 미국 주식시장도 타격을 입었다. 실제로 엔과 유로에 대한 달러 시세의 불안정은 세계금융의 근간을 흔드는 파란 요인이 되고 있다. 95년 4월 당시 79엔이었던 달러 시세는 98년 말 1백45엔까지 상승했다. 3년간 무려 80%의 상승률을 보인 것이다. 유로 탄생 전 유럽의 기축통화였던 마르크에 대해서는 같은 기간에 50% 상승했다. 그런 변동은 각국 경제의 기초여건과는 거의 관계없이 발생하며 아시아 경제위기의 커다란 원인이 됐다. 페그제를 택한 아시아의 소국들이 대국의 통화변동에 휩쓸렸던 것이다.

외교관계위원회의 프로젝트 팀 내에 독일·일본·미국은 ‘타깃 존’(목표시세권)을 설정해 통화관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것도 의외는 아니다. 3국 통화의 안정이 바람직하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조만간 이 시스템이 도입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외교관계위원회 프로젝트 팀의 주요 멤버이자 美 컨설턴트 회사 블랙스톤 그룹의 회장인 피터 피터슨은 “그것은 현실성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경기후퇴가 한창일 때 대통령에게 ‘달러안정을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재무장관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문제는 美·日·유럽의 경제가 공통점이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최대 차이점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다시 말해 다년간 무역적자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라는 점이다. 지난주 워싱턴에 모인 자본주의의 지도자들이 한층 더 결속을 다지게 되기만 바랄 뿐이다.

With Rich Thomas in Washington,
Velisarios Kattoulas in Tokyo and
Maggie Ford in Jakarta

Kenneth Klee 기자
뉴스위크 한국판(http://nwk.joongang.co.kr) 제 399호 199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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