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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5) 장제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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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도에 포격을 가하는 샤먼의 중공군 포대. 김명호 제공

1958년 8월 23일 시작된 중공의 금문도 포격을 거론할 때마다 견고한 지하요새와 군·관·민이 일치 단결해 금문도를 끝까지 사수했다며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을 떠난 당사자들이 쓴웃음을 지을 일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정작 감탄해야 할 것은 정치·군사·외교 문제가 얽히고설킨 속에서 한 개의 중국을 고집하며 국·공 양당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희극성이다.

1949년 10월 말, 금문도에서 벌어진 국·공 양군의 치열한 전투는 현대판 적벽대전이나 다름없었다. 3세기 초 조조가 적벽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천하가 3분된 것처럼 신중국 선포 3주 만에 중공군의 완패로 끝난 금문의 구링타오 전투는 중국을 둘로 갈라놓기에 충분했다.

2㎞ 정도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금문의 국민당 군과 샤먼의 중공군은 계속 포격전을 벌였다. 전력은 하늘과 바다를 장악한 국민당 쪽이 우세했지만 50년 9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대만을 방문했을 때 중공은 10일간 맹폭을 가해 금문도 탈취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53년 한국전쟁이 정전 상태에 들어간 후부터 중공은 샤먼 전선에 공군과 해군을 비롯해 포병을 본격적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대만으로 이주한 장제스 정권의 양대 지주는 미국의 군사지원과 경제원조였다. 엄마 젖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미국은 쓰디쓴 과일들을 권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생존을 위해 삼킬 수밖에 없었다. 트루먼이 “국제적으로 대만의 지위는 확정된 것이 없다” 며 대만 통치의 합법성을 부정했을 때 성질을 죽이느라 무진 애를 썼고, 미국이 “중화민국은 대만과 팽호(澎湖)열도, 금문도와 마조도를 대표한다. 단 금문도와 마조도는 방위구역에서 제외한다”는 공동방위조약
체결문을 내밀었을 때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57년 3월 타이베이에서 미군 하사관이 혁명실천연구원 직원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인이 목욕하는 것을 몰래 들여다 봤다는 것이 이유였다. 연일 반미 시위가 거리를 메웠지만 장제스는 미국에 유감을 표명하고 시위를 거둬들이게 했다. 미국 특사의 보좌관이 쑹메이링에게 심한 농담을 했다는 말을 듣고도 웃어넘겼다.

1년 후 다시 대만을 방문한 덜레스는 “중국에 내전이 재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금문도와 마조도에서 국민당 군이 철수할 것을 대놓고 요구했다. 미국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던 장제스였지만 이것만은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미국 기자들을 향해 “중공의 금문도 포격은 대만 공격의 전 단계다. 우리도 포격을 멈출 수 없다”며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역사적으로 금문도는 대륙이 대만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1661년 해적 출신 정성공(鄭成功)은 금문도를 장악한 후 대만 정벌에 성공했고, 강희제 시절 시랑(施琅)이 대만을 평정할 때도 금문도가 발진기지였다.

1958년 7월 중순 베이다이허서 열린 중공 중앙위원 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은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와 총참모장 황커청(黃克誠)에게 서신을 발송했다. “중동 쪽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 발생했다. 내 의견에 동의하면 이 편지를 예페이에게 전달해라.”

8월 20일, 중앙군사위원회는 푸젠(福建)성장과 서기를 겸하고 있던 푸젠군구 부사령관 예페이를 베이다이허로 호출했다. 당시 푸젠 지역에는 40일간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예페이는 벼락 때문에 비행기 추락을 염려하는 참모들의 건의를 무시했다. 피해 복구와 금문도 포격을 지휘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는 것을 중앙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펑더화이와 린뱌오를 대동하고 예페이를 만난 마오의 지시는 간단했다. “23일 오후 5시30분부터 금문도에 대규모 포격을 퍼부어라. 샤먼까지 내려갈 필요 없다. 여기서 지휘해라.”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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