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이상적 남성의 표본, 바로 전쟁이 만들어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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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기사도에서
테러리즘까지
리오 브로디 지음
김지선 옮김, 삼인 888쪽, 3만5000원

제목이 시사하듯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성근 전쟁사다. ‘성글다’함은 사료나 해석의 부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역사를 다루되 그 원인이나 전략전술, 전쟁영웅이 아니라 전쟁이 가져온 인식의 변화, 그 중에서도 ‘남성성’에 초점을 맞춰 서술했기에 드는 인상이다.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석좌교수인 이 책의 지은이는 전쟁이 ‘남성’이란 존재를 만들어 온 동시에 ‘전쟁’ 또한 남성성의 변화와 더불어 진화해 왔다고 본다. 투쟁심, 책임감 등 이른바 남성성이 고정됐다는 통념에 도전한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독가스, 기관총 등 대량 살상무기가 등장하면서 전쟁과 남성다움의 양상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사진은 1차 대전 당시 프랑스 전선에서 방독면을 쓰고 있는 영국 군인들. [삼인 제공]

 동성애자들의 군 입대 허용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변화의 대표적 사례다. 반대론자들은 동성애자들이 투쟁심, 책임감 등 남성적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전제 하에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하면 전투력이 떨어질 것이란 주장을 편다. 하지만 이같은 인식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보편화됐다고 지적한다. 기원전 4세기 동성 연인들로만 구성된 테반 성단은 고대 그리스의 자랑거리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군도 ‘절친한 벗’의 존경이라는 영예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전사의 가장 이상적 동기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종교라는 영적인 세계나 여성적인 가정세계와 대조적으로, 힘을 바탕으로 한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기사도 제도로 대표되던 남성성은 현대로 접어들며 급변한다. 대량 학살 무기의 개발과 포스트 산업사회의 전면적 대두로 전쟁-남성성의 결합이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힘 좋은 노동자보다 컴퓨터를 다루는 샌님이 직장을 얻고 가족을 부양하는 데 훨씬 유리한 시대에 이상적 남자상이 변하기 마련이란 주장이다.

 빈 라덴이 주도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테러리즘에 대한 해석은 흥미롭다. ‘불순’하며 여성적인 산업사회에 대한 ‘순수’하고 남성적인 전사사회의 공격으로 풀이했다. 전쟁=남성이란 도식을 깨뜨리는 이 책은 분량도 만만치 않고 서술방식도 교양서라기보다 학술서에 가까워 곳곳에 담긴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내려면 인내가 필요하긴 하다.

김성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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