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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다르지만 TBC 부활엔 한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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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달 30일에 열린 TBC종방 30주년 행사 ‘TBC는 영원하리’에 참석한 사카키바라(오른쪽)가 김재봉 중앙매스컴사우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해마다 TBC 종방일엔 한국을 찾아왔다.


TBC 동양방송(이하 TBC)의 깃발이 내려진 1980년 11월30일. 고별 방송을 전하며 눈물 범벅이 된 TBC 임직원 앞에 격앙된 모습의 남자가 나타났다.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이었다. 그는 어눌하지만 또박또박한 한국말로 직원들에게 호소했다. “일본 언론도 수난을 겪은 적이 있지만 결국 자유 방송시대가 돌아왔습니다. 기다립시다. 우리 희망으로 버팁시다.”

 1960~70년대 TBC에 마케팅 컨설팅을 했던 사카키바라 요이치로(<698A>原陽一朗·74)가 주인공이다. 사카키바라는 그 뒤 해마다 TBC 종방일(11월30일)이 되면 한국에 와 옛 동료와 아픔을 나눴다.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소망하는 바는 같았던 것이다.

TBC 종방 30년을 맞은 지난달 30일, TBC의 정신이 중앙일보 종합편성 채널을 통해 되살아나기를 기원한 ‘TBC는 영원하리’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을 찾았다. 그는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힌다”며 “TBC의 찬란했던 전통을 물려받은 중앙일보가 종편 사업자로 선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사카키바라가 TBC와 인연을 맺은 때는 69년. 일본 방송 NHK의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한 뒤 민간 라디오 방송국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한국인 지인의 소개로 ‘TBC라디오’에 마케팅 노하우를 전수하게 됐다. 프로그램별로 청취자를 세분화해 마케팅을 하고, 광고주 인식 변화 캠페인을 벌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일본의 우수 인력을 TBC에 소개하며 10년간 한·일 방송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TBC라디오는 당시 청취율과 광고 판매율 1위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대학 때 한국 고대사를 연구할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많았는데, TBC에서 일하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며 “TBC 사우들과 통행금지 시간을 넘겨가며 소주를 마시다 파출소 신세를 진 적도 여러 번”이라고 회고했다.

 사카키바라는 자신을 소개할 때 ‘신라의 후손’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한국 이름은 박양일(朴陽一). 그의 성 사카키바라에 있는 사카키의 한자가 목(木)자와 신(神)자가 합쳐진 것이라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연결시켜 박씨 성을 쓴다. ‘양일’은 일본 이름 요이치로의 한자에서 일부를 따왔다.

 79년 TBC를 떠나 일본에서 방송 관련 컨설턴트로 활동하던 그에게 날아온 TBC 종방 소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서둘러 서울에 왔지만 자신이 한때 근무했던 사무실은 이미 훵하니 비어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자신이 잠시 몸담았던 ‘FM전송부’라는 부서 명판만 겨우 찾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그나마 내가 몸담았던 부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감사했다”면서 “명판을 일본으로 가져가 가보로 보관하다가 TBC 동우회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전립선 암으로 투병하기도 하고, 부인이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려움 속에서도 31년간 한해도 빠지지 않고 TBC를 생각해 한국으로 달려온 사카키바라. 이같은 배려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TBC동우회는 지난달 30일 ‘TBC는 영원하리’ 행사에서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이날을 그의 성의 일부이자 별명인 바라를 딴 ‘바라상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의 방송은 30년 전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며 “한발 앞선 콘텐트와 글로벌·디지털 마인드로 무장해야 아시아 최고의 방송사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고은나래·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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