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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규칙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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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

“이것(K-9 자주포)밖에 없나? 왜 대응하는 게 이리 소심하냐. 더 과감하게, 대담하게 할 것이 없느냐? (자주포 말고) 다른 수단은 없느냐?”

 지난달 23일 낮 연평도가 적의 해안포 공격으로 불바다가 된 직후, 청와대 지하벙커로 달려온 이명박 대통령은 답답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쏘아대는 북한 해안포에 우리 군이 자주포 ‘4문’(실은 3문)만으로 맞서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서다.

 “교전규칙상 포는 포로만 대응해야 합니다.” 군 출신 관계자는 대통령의 추궁에 이렇게 답변했다. 이어 “또 우리가 포로 반격할 경우 적이 쏘는 곳만 쏘게 돼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답변을 들은 대통령은 답답함을 넘어 노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문민 출신 청와대 보좌진들조차 “이번 기회에 북한이 다시는 도발하지 못하게 연평도 앞에 있는 저것들(북한 해안포부대)을 다 쳐야 한다”고 발을 굴렀다. 그러나 군 측은 “교전규칙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포탄 150여 발을 난사해 우리 장병 2명과 민간인 2명을 살해하고 건물 수십 채를 박살낸 북한의 만행에 우리 군은 80여 발의 포탄을 그들의 해안포 주변에 쏜 것으로 반격을 마무리했다. 이 대통령이 이날 오후 상황이 종료된 직후 합참으로 달려가 교전규칙 강화를 지시한 건 우리 군의 이처럼 미흡한 대응 탓이 컸다는 후문이다.

 벙커에서 상황을 지켜봤던 청와대의 한 인사는 “대통령이 군 최고통수권자니까 명령만 내리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한데 실제상황에선 가이드라인만 제시하게 돼 있고, 전투는 군이 다 하는 것이더라”며 “군이 조금만 더 결기 있게 대응했어도 이렇게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군 측의 해명을 들어보면 사정을 이해할 측면이 없지 않다. 교전규칙은 유엔사와 합의해 만들어진 국제규범과 같은 것인 만큼 개정되기 전까진 지키는 것이 옳다. 또 우리 군이 교전규칙의 한도를 넘어 반격을 가할 경우 북한에 추가 도발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틀린 건 아니다.

 그렇다 해도 군과 정부는 할 말이 없다. 포는 포로만 대응해야 한다면 왜 북한 해안포 수백 문이 코앞에 깔린 연평도에 자주포 6문만을 배치했는가. 그나마도 전투상황에선 절반밖에 쓸 수 없었다. 또 적이 쏘는 지점만 쏘게 돼 있다면 왜 적의 해안포대를 직접 때릴 수 없는 곡사포만 갖다 놓았는가.

 우리 군이 경험한 마지막 전쟁은 37년 전 끝난 베트남전이었다. 전쟁이 없는 군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는 주적(主敵)개념을 폐기해야 한다느니, 해외파병은 무조건 반대한다느니 하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군의 유약성이 더욱 배가됐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은 역설적으로 우리 군에 보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가 당한 건 명백하지만, 대신 우리 군은 정신무장에서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군 지휘부와 정부는 이번 사태를 금과옥조로 삼아 최소한 국민이 발 뻗고 잘 수 있는 안보태세 완비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라.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