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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헌터〉의 사에바 료

중앙일보

입력

1.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

츠카사 호조의 〈시티헌터〉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사에바 료'란 인간은 대개 두 가지의 이중적인 평가를 받곤 한다. 한 가지는 성도착증에 가까울 정도로 저질스러운 여성편력의 소유자에다가 편집증적인 살인감각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상처로 뒤덮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로서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무의식적인 보호본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사에바 료는 바로 후자의 인간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질 예정이다. 아마 후자와 관련된
료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에바 료의 그 저질스럽고, 성도착증적인 성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선 사에바 료의 성향을 간단히 짚어보기로 하자. 일단 그는 좋은 눈빛에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키도 180이 넘는다. ^^) 하지만 처음 그를 본 사람은 그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늘 흐느적 거리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얼 빠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뢰를 부탁하러 온 여자들은 처음부터 기겁을 하며 사에바 료에 대해 심한 불신감을 느끼게 되고 오히려 보호받기 보다는 사에바 료의 추근거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겠다는 쓸데없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두번째로 그는 완벽한 기술을 소유한 초일류 스위퍼다. 사에바 료의 신기에 가까운 총솜씨와 뛰어난 감각은 만화 속에서 으레껏 나타나는 과장임에도 불구하고,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람 죽이는 일을 눈 하나 깜짝않고 해낼 것 같은 냉정함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론 위협사격으로 상대방의 기를 꺾어 전의를 상실하게 함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쪽이다.

세번째로 료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부인할 수 없는 여자 밤 사냥꾼이자, 성도착증적인 속옷 편집광에 머리 속에 오로지 여자여자여자 생각밖에 없어 보이는 얼 빠진 인간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가끔 나도 이 인간을 옹호하는 게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정말 징하게 여자를 따라다닌다. (사에바 료의 이면의 진실을 믿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정말 화딱지가 나서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네번째로 그는 과거에 쓰라린 기억 때문에 늘 마음 속에 상처를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치유되지 못한 상처 때문에 사에바 료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이상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를 사랑하는 가오리나 사에코(경찰계 여형사), 팔콘 (게릴라 용병시절 라이벌이자, 친구), 블러드 마리(사에바 료의 첫번째 파트너, 대단한 미인) 등은 뻔히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지만, 사에바 료의 진심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있다..(자세한 얘기는 뒤에 하기로 하고.. 흠흠!!)

다섯번째로 사에바 료의 유일한 약점은 비행기에 대한 악몽같은 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과의 여행 중에 당한 비행기 추락 사고 때문에 사에바 료는 가족을 잃었을 뿐 아니라, 게릴라 전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상대방의 피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끔찍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이미 사람이 죽고 죽이는 상황에 익숙해져 버린 료는 결국 종전이 된 후에도 손에서 총을 놓지 못하고 전쟁의 그림자 속을 배회하며 그나마 속죄하는 마음으로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정의를 지키려는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고독한 도시의 스위퍼, 사에바 료

사에바 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과거에 그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이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에바 료는 비행기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정부군과 게릴라군 사이의 전쟁이 한창이던 중미 대륙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불행하게도 료는 게릴라 기지에 흘러들어가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방법과 상대를 죽이는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그때 오직 살기 위해 전쟁을 치르던 료에게 그나마 사나이로서의 듬직함과 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가이바라... 그 사내와의 만남은 료에게 있어선 커다란 불운이 아닐 수 없었다. 가이바라는 전쟁의 참혹한 속에서 사춘기를 보낸 어린 료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우상과 같은 존재였고, 그에게 모든 살인기술과 생존하는 법을 알려준 스승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이바라 또한 그 전쟁의 피해자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 이미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린 채 오직 살기만이 가득한 전쟁광으로 돌변해 버리고 만 인간이었다.

가이바라는 전쟁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 상대편을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사람의 초인적이고도 광기어린 살기를 북돋우는 '엔젤 더스트'란 약을 개발하게 된다. 그것은 효능이 뛰어난 일종의 환각제같은 것으로, 한 번 그 약을 몸에 투여하면 좀비처럼 명령에 복종하며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엄청난 파워와 광기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살인기계가 되고마는 무시무시한 약이었다. 그리고 가이바라는 이 끔찍한 약을 바로 자기의 아들과도 같았던 사에바 료에게 투약한다. 그 약을 투여한 사에바 료는 믿을 수 없는 광기로 상대편 병사들을 모조리 도륙한다. 그 비극적인 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바로 사에바 료의 라이벌이자 지기가 된 허깨비 팔콘이었다.

엔젤 더스트를 이겨내기 위한 사에바 료의 눈물겨운 노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이 안되어 있지만, 작가는 나중에 료의 파트너였던 믹 엔젤이 똑같은 방법으로 가이바라에 의해 엔젤 더스트를 맞은 뒤 회복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끔찍한 모습을 하게 되는지 보여줌으로써 당시 료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더더욱 심도 있게 드러내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료는 미국으로 건너가 블런드 마리의 아버지를 첫 파트너로 맞아 도시의 크리너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고, 이후 블런드 마리하고도 잠시 호흡을 맞추다가 믹 엔젤과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다. 그 이후 맞이하게 된 파트너가 바로 마키무라 히데유키. 바로 가오리의 의붓오빠였다.

어쨌든, 지금까지 얘기한 료의 과거는 료를 자기만의 세계에 가둬놓고 사람들 속에 친화되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으로 남게 된다. 료는 자신의 성장기를 지배했던 살육과 전쟁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상인으로서 사는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비열하고 이기적인 악당들과 싸우면서 한번도 '정의' 따위를 운운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총알을 맞고 나가 떨어진 악당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 속엔 음울하고 자학적인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다. 아마도 료는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죽음과 맞닿은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미 자신에게 익숙할대로 익숙해져 버린 총성과 전쟁의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고, 종전이 되어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삶에 대한 선택의 여지도 없이 다시 도시 뒷골목에서 스위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랑이라곤 받아보지도 못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처절한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을 자학하며 애정기피증을 보이게 된다.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되려고 하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조차 언젠가는 떠나보낼 사람으로 여겨 좀처럼 마음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마키무라 히데유키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의붓여동생인 가오리 때문에 료와 같이 일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도 료는 그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은 어차피 혼자니까 네가 언제 떠나든 상관없다는 말로 그는 히데유키를 놓아주려고 했었다.(그 때 히데유키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가 없으면 너의 그 고약한 술버릇을 누가 막아주냐...'하고..) 그 뒤 히데유키가 가이바라가 조직한 유니온 테오테 일당에게 당해 목숨을 잃으면서 가오리를 부탁하자, 료는 그 유지대로 가오리를 보호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더러운 세계에 가오리를 끌여 들였다는 자책감과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진심을 밝히지 못하는 두려움과, 자신이 가오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에 늘 가오리의 시선을 외면하고 만다.

사에바 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세상을 '바깥 세계'라고 말하곤 하는데, 늘 가오리를 그 바깥 세상으로 돌려보낼 준비를 하며 가오리가 혹시 살인으로 손을 더럽힐까봐 제대로 발사가 되지 않는 총을 주게 된다. 그러면서도 가오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고 늘 가오리를 떠나보낼 시기를 늦추면서 그렇게 제자리만 뱅뱅 도는 답답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항상 료는 가오리를 늘 남자 대하듯 하며 무시하거나 아니면 가오리 앞에서 여자들에게 더더욱 진득하게 추근대곤 해서 무자비한 가오리의 몽동이 세례를 받곤 한다. 어쩌면 료는 가오리를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만큼 정말로 가오리가 자신을 외면하고 떠나버릴까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하는 건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가오리가 늘 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료가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릴 때마다 몽둥이 세례를 퍼부어 주기 때문에 그때마다 도리어 안심하고 있는 건지도...(적어도 나는 가오리의 망치에 얻어맞아 처참하게 땅에 처박힌 료의 얼굴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발견하고 있다...)

료가 친구들에게조차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자신의 위태위태한 삶에 끼어들었다가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두려워서다. 스토리 중간에 료의 친할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과 대면했을 때 료는 가오리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지금 너 하나 지키는 것만으로 벅차서 다른 가족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자신이 없어서, 상대방이 다칠까봐 두려워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도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두려워서 늘 허둥대는 료를 보고 그의 동료 팔콘은 늘 고개를 가로 젓는다. "쯧, 이 미숙한 놈..."이라는 안타까운 비난과 함께...

사에바 료의 여자밝힘증에 대해..

얘기가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니 료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정도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이제 료의 성도착증적인 증세에 대해서 간단하게 짚어나가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를 지어야 되겠다.. 일단 료의 그 징글맞은 행동의 이면에는 '엄마에 대한 사랑을 그리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창 엄마 품에서 어리광 부리고 재롱을 부려야 할 나이에 료가 부모를 잃은 데다가 전쟁에 지친 남자들 틈에서 엄하게 자랐기 때문에 료의 내면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애정결핍이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뭐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대개 대여섯살 된 남자애들이 밤에 잘 때 자기 엄마 가슴을 만지면서 자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면 료의 이런 행동 또한 아량으로 봐주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사에코가 료를 시험해 보기 위해 진짜로 진지하게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을 때 료가 꽁치 빠지게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료의 그런 행동이 여자의 육체에 대해 한참 관심을 갖고 호기심있게 바라보는 사춘기 소년들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채릴 수 있을 듯..!!)

료의 그 파렴치한 행동의 두번째 이유는 협박과 죽음에의 공포로 떨고 있는 여자 의뢰인들을 다소 정신없게 만듦으로써 보다 편안하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는 료만의 특이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료의 기습(?)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여자들은 허탈하게나마 실컷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찾게 되고, 자신의 문제를 좀더 편안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료의 그런 진심에 감동되어 료에 대한 처음의 그 난잡하고 불쾌했던 이미지를 싸악 지워버리고, 료에게 매료되는 감정의 반전까지 보이고 만다. 가오리의 무시무시한 망치가 더 이상의 진전을 막고 있기는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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