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이 국민 앞에 직접 나서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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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세계사를 바꾼 9·11 테러는 미국시간으로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42분에 시작됐다. 납치된 아메리칸항공 소속 여객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북쪽 동(棟)에 충돌한 것이다. 이어 9시3분에는 두 번째 여객기가 남쪽 동으로 돌진했다. 이 시각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육개혁에 관해 연설하고 있었다. 부시가 첫 보고를 받은 것은 9시5분이었다. 그로부터 26분 후 부시는 첫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사태는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 공격”이라는 것이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국민이 당한 비상사태의 성격을 신속하고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다.

 부시는 이후 10시간 가까이 경호상의 이유로 군부대에 머물렀다. 그러곤 오후 7시 백악관으로 귀환했다. 그는 1시간 반 후인 오후 8시30분 사건 발생 약 12시간 만에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미국에 테러리즘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대처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날 부시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시는 테러를 21세기 첫 전쟁으로 규정하고 “테러세력과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나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희생자를 언급하면서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민에 대한 외부의 대규모 공격 같은 국가비상사태가 터졌을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은 대통령이다. 그가 사태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각오와 대처 방식을 천명하느냐가 사태의 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굳이 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은 국가의 정신적·물질적 최고지도자다. 국민에게 정신적·물질적 충격을 주는 사태가 터졌을 때 대통령은 신속하게 국민 앞에 나타나 무엇인가 얘기를 해야 한다. 지금 벌어진 일은 무엇이며 정부와 군은 어떻게 할 것이니 국민은 어떻게 해달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소통이요 통치다.

 미국의 대통령은 26분 만에 국민에게 성명을 발표하고 12시간 만에 담화를 내놓았으며 사고 다음 날 집무실에서 바로 기자회견을 했다. 미 본토와 국민을 공격한 적이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한국의 대통령은 사태 발생 사흘이 가까워오도록 국민에게 아무런 얘기가 없다. 적의 얼굴이 너무나 명확한데도 아무런 얘기가 없다. 오히려 적이 ‘남한이 먼저 공격’ 운운하면서 남한을 농락하는데도 아무런 얘기가 없다. 청와대에서 들리는 건 대통령이 확전(擴戰)을 막도록 명령했다느니, 그게 아니라 와전된 거라느니 하는 혼란스러운 얘기뿐이다. 나라는 비상인데 대통령의 소통은 포연(砲煙)처럼 사라지고 없다.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한나라당은 그동안 입만 열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쇠고기 촛불사태에 충격을 받아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4대 강 사업에서 여전히 소통의 부족함을 느꼈으니 소통에 주력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가장 소통이 필요한 시기에 대통령은 국민 앞에 보이지 않고 있다. 왜 이렇게 침묵하는가.

 이제라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서야 한다. 주저할 게 없다. 초기 대응이 미흡했으면 사과하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에 솔직히 답하면 된다. 대통령이 말하는 몇 배의 응징이란 무엇인지, 도발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한 5·24 담화는 어떻게 됐는지, 외교·안보적인 한계는 무엇이며 그 한계 속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의 ‘백성’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장기적으로 불한당 북한을 어떻게 다루어나갈 것인지 대통령이 국민에게 하지 못할 말이 어디에 있는가.

 대통령은 행여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문제를 언급하는 게 사태 해결과 향후 대처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杞憂)다. 국민은 나라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만큼 성숙하다. 문제는 이해와 소통이다. 대통령의 말솜씨가 다소 부족해도, 대통령이 그동안의 공언을 지키지 못한 부분이 있어도 대통령이 솔직하게만 국민에게 설명하면 국민은 이해하고 대통령을 따를 것이다. 이런 소통과 민주(民主)의 체제가 북한보다 남한이 우월한 대표적인 강점이다. 북한이 서해안 절벽에 1000문의 대포를 숨겨놓아도 남한의 이런 단결을 이길 수는 없다. 대통령은 남한의 강한 무기를 왜 방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