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또 다른 한류의 꿈, 공예문화상품 ⑨ 젊은 디자이너들의 ‘한국적 가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22면

단순한 디자인의 내촌 목공소 가구는 삭막한 공간에도 온기를 불어넣는다.


트렌디한 현대 가구는 전통적으로 가구를 짜던 장인이 아니라 건축가들이 만들었다. 20세기 가구 디자인의 기틀을 잡은 찰스 임스(Charles Eames), 가구 디자인의 거장 조지 나카시마도 건축가였다. 그들은 자신이 지은 건물에 놓을 가구를 직접 만들었다. 현대식 건축에 녹아드는 가구를 전통·동시대 가구 중에는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가구를 사랑했다. 가구의 전통은 그래서 단절돼 있다. 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의 방에 어울리는 가구는 보통 현대적 건축물에 놓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우리의 건축가 중엔 나서서 가구를 만드는 이도 드물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구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기 힘들어졌다. 이 와중에 한국적 아름다움을 놓지 않고 현대 공간에 어울리는 가구를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이가 강원도 홍천 내촌목공소 이정섭(39) 목수, 계원디자인예술대학교 가구디자인학과 하지훈(38) 교수, 김경원(38) 가구디자이너다. 그들이 만드는 현대적 한국 가구는 무엇인지, 이어야 할 전통은 무엇인지 보고 들었다.

글=이정봉 기자 ,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미국 대학에 한국 대표해 들어가 … 이정섭 목수

다보탑의 네 귀처럼 앉는 부분의 좌우가 살짝 들려 있는 벤치(위). 겉으로 삐져나온 사궤맞춤이 은근히 맛깔난다

이정섭 목수는 원래 한옥을 짓는 목수일부터 시작했다. 10여 년 전 강원도 태백의 한 한옥학교에서 한옥 짓기를 배우고, 한옥을 보수하고 짓는 일을 하다 가구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그의 가구는 한옥처럼 단순하면서 구성지다. 탁자는 기둥·들보의 아귀가 맞아떨어져 못을 안 써도 빠지지 않는 사궤맞춤으로 짠다. 하지만 상판을 이어붙일 때는 나사못을 사용해 튼튼하게 했다. “우리의 옛 가구에 못을 안 쓴 건 철이 비싸서였을 뿐이므로 가구를 더 아름답고 튼튼하게 할 수 있는데 굳이 옛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의 디자인은 한옥처럼 은근하다. 벤치의 앉는 부분은 기와지붕처럼 살짝 위로 삐쳐 있다. 내려다봐서는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로만 들렸다. 그는 “엉덩이가 미끄러지지 말라는 실용적 디자인”이라면서 “불국사 다보탑의 은근한 삐침에서 몸이 전율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모던한 공간에도, 한옥 스타일의 공간에도 잘 어울린다. 건축사무소 공간이 50주년을 맞아 사옥 지하1층에 문화공간 ‘공간서가’를 열었는데, 그곳에 이 목수의 가구를 들였다. 공간 사옥은 일본 건축가들 사이에 한국 최고 현대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 배움의 전당 내 한국문화실(Korean Heritage Room)에도 그의 가구가 한국을 대표해 들어간다. 피츠버그 대학은 세계 각국의 문화실을 두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이는 세계 대학 중 유일하다.

하지만 그가 쓰는 목재는 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등에서 수입한 활엽수다. 나뭇결이 아름다워 최소한의 디자인 외에 다른 치장이 필요치 않다는 게 이유다. 그는 한국식 가구를 만들지만 이렇게 까다롭게 경계를 두지 않아 자유롭다.

■ 사방탁자, 곡선미를 뽐내다 … 김경원 작가

현대적 스타일로 탈바꿈한 사방탁자. [사진제공 김경원]

김경원 작가는 가장 한국적 가구인 사방탁자를 자유롭게 해석했다.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인 한옥방 안에 있던 가구 중 문갑·장롱은 닫혀 있는데, 사방탁자는 개방적이다. 김 작가는 “뼈대만 있어 개방성이 있는 특성을 활용해 구석에 놓던 사방탁자를 방의 안쪽으로 불러들였다”고 말했다.

그의 사방탁자는 유려한 곡선미를 자랑한다. 흔히 보듯 딱 맞아떨어지는 직선으로 이뤄진 전통적 사방탁자와는 완전히 다른 디자인이다. 그는 사방탁자의 개방성과 기능성만 남겼다. 그 역시 고주파 벤딩을 통해 원통형 나무를 만든 뒤 창을 내듯 나무를 잘라내 현대적 사방탁자를 완성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방탁자를 조명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조명을 안에 넣고 고탄력 스판덱스로 씌워 사방탁자의 뚫린 면을 막으면 조명이 비추는 실루엣이 아름답다. 그는 “조선시대 목가구의 백미는 사방탁자”라며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어도 어울릴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최소한의 목재만으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한 디자인을 실험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런던에서 9개의 나무 막대기와 앉기 위한 판재 하나로 의자를 만들어 전시했다.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 대한 실험이자, 한국적 형식미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 그는 “서양 가구는 1920년대 이후 정갈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추구했다”며 “사실 이는 우리가 600년 동안 해오던 것”이라고 말했다.

■ 소반의 다리, 금속으로 날렵하게 … 하지훈 교수

소반의 다리모양을 형상화한 라운지소파. [사진제공 하지훈]

하지훈 교수는 2008년 상하이에서 있었던 전시회에 재기발랄한 색상과 디자인의 의자, 전통적인 자리를 변형한 작품을 함께 내놓았다. 자개를 입히고 모서리를 둥글게 깎은 벤치도 전시했다. 관람객들은 현대적 디자인의 의자보다 자리와 자개 벤치에 몰렸다. 하 교수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외국인 관람객의 관심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라고 했다.

그가 만든 자리는 세워놓으면 의자처럼 앉을 수 있고, 눕히면 등을 기대고 누울 수 있다. 현대적 입식 생활 패턴과 전통적 좌식 생활 패턴을 한데 아우르는 디자인이다. 벤치는 검게 칠한 바탕 위에 자개를 붙인 것이다. 검은 칠에는 옻칠이 아니라 자동차를 도장할 때 쓰는 페인트를 썼다. 한국적인 것은 디자인에만 슬쩍 남기고 과학적 기술을 최대한 활용했다.

최근에는 소반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나주소반을 만드는 무형문화재 김춘식 선생과의 협업을 통해 전통 나무 소반과 비례는 같지만 현대적 기술을 이용해 가구를 만든다. 소반의 다리를 금속 소재로 만들어 날렵하게 하고 소반의 다리 형태를 테이블·라운지소파에 적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컴퓨터를 이용해 소재를 깎는 CNC 기계를 쓰고, 고주파 벤딩 기술을 써 나무를 곡선으로 휘게 만든다. 하 교수는 “현대 기술을 이용하면 다양한 형태의 작업이 가능하다”며 “전통적인 것에 대한 과감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