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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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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나는 무언가에 후끈 단 기분으로 극단 사무실을 나와 혜련의 아파트가 있는 동네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얼마 뒤 차가 그 동네로 접어들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우리가 만날 곳을 정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무턱대고 처음 눈에 띄는 일식집 앞에 차를 세우게 하고, 그리로 뛰어 들어가 무슨 통보라도 하듯 혜련에게 그 식당 상호를 일러주었다.

 아파트가 가까운 데 있었던지 혜련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십 분도 안 돼 나왔는데, 차림과 모습은 전화를 하면서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무슨 임신복 같은 추레한 원피스에 방금까지 누웠다 일어난 사람처럼 부스스한 머리가 공연히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였다. 이미 추운 계절은 아닌데도 깊게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나, 이상하게 구부정해 보이는 등허리도 내게는 아주 낯설었다.

 “어이. 여기야, 여기.”

 나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에 팔까지 휘저으며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알려주었지만, 혜련이 가까워 올수록 그녀를 살피는 내 눈길은 더 차분하고 세밀해졌다. 아마도 그 때문에 십 년도 훨씬 넘은 그때의 그녀 모습을 아직도 이처럼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말 없이 다가와 식탁에 마주 앉은 혜련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보다 훨씬 더 원기 없고 지쳐 보였다. 평소 코카서스 인종 특유의 풍부하고 거침없는 감정 표현과는 달리 표정 없는 그녀의 얼굴이 왠지 긴장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그 때문에 강조된 어둡고 굳은 음영은 그녀에게 일어난 심상찮은 변화를 한층 더 강조하는 효과를 냈다.

 “어서 와. 그런데 정말로 얼굴이 좋지 않네. 무슨 일이야? 다른 일 있는 건 아니지?”

 그런 내 물음에 그녀가 문득 힘 없는 웃음을 짓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반드시 무슨 단서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한 관찰의 눈길로 그녀를 살피던 나는 그런 그녀의 두 눈에서 갑자기 무슨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서도 뚜렷이 드러날 만큼 색이 바랜 듯한 눈동자에 유난히 홍채가 크게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눈에서 읽히는 것은 피로나 병색이 아니라 이상한 나른함과 방심이었다. 앉는 자세도 편안함 이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 듯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바짝 갖다 붙이면서도 두 팔은 배를 싸안 듯하며 식탁에 걸쳐 구부정해진 등을 받치는 게 제법 달이 찬 임산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헐렁하게 걸치고 있는 것도 임신복 같은 원피스가 아니라 바로 임신복 같았고, 화장 안 한 얼굴에서는 희미하나마 기미나 주근깨 같은 것도 보였다.

 ‘아하, 임신을 한 것이로구나’.

 그런 깨달음에 소스라치며 조금 전 통화를 떠올려 보니, 그녀가 한 말 가운데 얼른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도 모두가 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지레짐작으로 후끈 달아 달려온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일어난 사고가 그 정도에 그친다는 게 새삼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 바람에 그날 혜련과의 점심식사는 느닷없이 가족적인 배려로 훈훈하기 그지없는 시트콤 속의 한 장면처럼 변해갔다.

 나는 혜련에게 ‘갈매기’의 음악을 맡기려던 계획을 깨끗이 접고, 피붙이 같은 정으로 임산부의 영양과 건강을 배려하는 식단을 고르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혜련이 먼저 그 일로 내게 감사 할 정도였다.

 “선생님, 고마워요. 저를 이해해 주셔서. 실은 오늘 꽤나 선생님께 시달릴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이어 자신의 처지를 은근히 암시하는 해명과 약속까지 덧붙였는데도 지레짐작에 빠져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실은 한번 더 선생님과 작업해 볼까도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나중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추스르고 나면 다시 선생님과 같이 일해 보도록 하죠. 선생님도 그때까지 잘지내세요.”

 그날 나는 혜련의 아파트 입구까지 환자 돌보듯 그녀를 부축해 데려다 주고 헤어졌다.

 ‘갈매기’ 음악은 혜련이 맡는다는 걸 워낙 결정적인 일로 믿고 있었던 터라 혜련을 단념하게 되자 나는 잠시 막연했다. 하지만 큰 쪽박이 깨지면 작은 쪽박이 나오기 마련, 나는 곧 적당한 음악감독을 찾아냈다. 지나치게 뮤지컬에 빠져 있다는 흠은 있어도, 그 또래의 무대음악 전공자 가운데서는 제법 고전적인 감각이 있는 친구였다.

 이 나라의 모든 연극 제작은 언제나 강행군이다. 음악에 이어 배역이 모두 결정되면서 다시 ‘갈매기’를 위한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치르기 마련인 비슷비슷한 홍역 끝에 ‘갈매기’는 마침내 무대에 올랐다. 결과는 한마디로 ‘배꽃동산’보다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체호프에 대한 까닭 모를 부채의식을 덜게 된 덕분인지, 나는 ‘갈매기’를 마지막으로 체호프를 향한 느닷없는 집착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나는 그해 남은 시즌을 이전 작품을 재공연하는 것으로 때우면서 그 두 해 체호프 때문에 무디어진 현대극의 드라마투르기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작품으로 이오네스코의 ‘무소’를 노려보며 이리저리 재고 있는데,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어느 날 대학로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줄곧 연극을 함께해 온 여자 단원 하나가 나를 찾아와서 불쑥 말했다.

 “선생님, 헬렌 킴 한국 떠난 것 아세요?”

 함께 작품을 할 때는 혜련과 유달리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내가 놀라며 물었다.

 “응? 혜련이? 걔가 왜 한국을 떠나?”

 “아니, 모르셨어요? 헬렌 킴은 선생님이 고향 후배나 가까운 친척 챙겨주듯 살갑게 챙겨준 사람 아니었어요? 작품도 몇 편 같이 하고….”

 “음, 그랬지. 옛날부터 아는 아이라…. 그런데 어찌된 거야? 혜련이가 한국을 떠나다니?”

 “지난달에 이혼하고 며칠 전 미국으로 돌아갔다네요. 그런데 정말로 선생님께 인사도 안하고 떠났어요?”

 “이혼했다고?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아이요? 아이라니요?”

 이번에는 그 여자 단원이 난데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혜련이 낳은 아기 말이야. 지난봄에 벌써 여러 달 되어 보였으니, 지금쯤 태어났거나 백일 안되는 젖먹이가 있을 텐데. 그 아이는 어쩌고 이혼이야? 뭐 잘못 안 거 아냐?”

 “에이. 헬렌 킴이 무슨 임신이에요? 지난가을에도 저하고 조깅까지 했는데, 전혀 임신한 티안 났어요. 선생님이야말로 무얼 잘못 아신 거 아녜요?”

 그래도 나는 내 지레짐작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접때 혜련에게 ‘갈매기’ 음악 맡겨보려 했는데, 그 때문에 못 하겠다기에 따로 사람 구한 거 아냐? 요즘 걔가 통 안 보이기에 나는 그 사이 몸 풀고 어디 깊이 들어앉아 있는가보다 했지. 그런데 무슨 뚱딴지같이 이혼이고, 출국이야?”

 “그녀가 그때 선생님께 자신이 임신했다고 직접 말했어요?”

 그제야 나도 찔끔한 구석이 있었으나, 여전히 그 단원의 말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글쎄. 그러고 보니 제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다만, 틀림없었어. 식당까지 임신복 차림으로 나왔고, 배도 상당히 불러 보였는데….”

 “그렇다면 잘못 보신 거예요. 내가 그 무렵 가깝게 지내서 아는데, 헬렌 킴 임신한 적 없어요. 더구나 그네들 커플 그때부터 이미 이상하게 삐걱거리고 있었거든요.”

 “그때 이미 이상하게 삐걱거리고 있었다고? 그들 부부가? 나는 아주 이상적으로 맞춰 잘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신혼 때만요. 아니면 겉보기만이었거나.”

 그제야 내게도 조금씩 진상이 짚여 오는 듯했다. 그러자 내 지레짐작이 부끄럽거나 후회스럽기보다는 그들에게 속거나 놀림 당한 것 같은 느낌에 화부터 났다. 하지만 왜 그런지 나도 잘 알 수가 없어 함부로 화를 내지도 못하고 볼멘소리만 했다.

 “사람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어? 나를 두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눈 뻔히 뜨고 속았잖아? 게다가 그 지경이 되어 떠나면서 인사 한마디 않는단 말이야?”

 “설마 선생님에게 장난을 치거나 속이기야 했겠어요? 저희들은 저희들대로 많이 괴롭고 힘들었겠지요.”

 그녀가 물색없이 그렇게 나를 위로하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무런 근거없는 불평을 그쳤다.

 그 여자 단원이 나간 뒤 나는 무슨 큰 낭패라도 당한 사람처럼 다급하게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혜련의 일을 알아보았다. 대개는 이런 저런 이유로 혜련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만 골라 물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혜련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몽 서방이나 한번 만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어디서 듣기라도 한 듯 다음날 그쪽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응, 몽 서방. 아니, 김 교수가 웬일이야? 실은 나도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김 교수가 언제나 그렇듯 예절 바른 어조로 안부를 물어오자 나는 궁금증을 억누르며 그렇게 받았다. 무언가 다급한 게 있는지 그쪽도 더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받았다.

 “감독님이 제게요? 무슨 일인데요?”

 “어떻게 된 거야? 헬렌 킴. 어제 이상한 얘기를 들어서.”

 “이상한 얘기라니요? 그 사람한테서 무슨 소식 있었어요?”

 김 교수가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다급한 심경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자네들 이혼했다며? 그리고 혜련이는 미국으로 가버렸다며?”

 “그걸 어제 들으셨다고요? 그럼, 저희들 일, 어제까지 전혀 모르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묻는 김 교수의 목소리에서는 조금 전과 달리 실망과 의혹을 숨기지 않는 착잡함 같은 게 느껴졌다. 김 교수는 당연히 내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이 혜련의 근황을 알고 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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