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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볼 수 없게 된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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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진홍
논설위원

# 신문을 펼쳐보는데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상대적으로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책을 보거나 컴퓨터 화면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지우개로 동전 크기만큼을 살짝 지운 느낌이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눈 주위를 마사지해 보았지만 여전했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황반변성’인가?”

 # 꼭 10년 전 이맘때 ‘황반변성’에 걸려 점차 시력을 잃어갔던 이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환으로 ‘타임’지에 입사해 편집장까지 지내고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대사로도 일했던 헨리 그룬왈드가 쓴 『나는 마음으로 봅니다』라는 책이었다. 원제가 ‘황혼(Twilight)’인 이 작은 책에서 그는 늘 보이던 것들이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점점 더 보이지 않는 세계로 걸어들어가던 자신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그는 사물을 보는 능력이 떨어지면서 오히려 내면을 보는 눈이 커졌음을 고백하듯 말했다. 언뜻 그것은 자위(自慰)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진심이었다.

 # 물론 그룬왈드의 상태는 지금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심각했다. 그는 평생을 활자와 더불어 살다시피 했는데 정작 자신이 직접 쓴 메모조차 읽을 수 없었다. 그에겐 세상이 온통 클로드 모네가 지베르니에서 그린 ‘수련’을 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마치 눈 앞에 베일 하나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의 나는 중심시야가 조금 흐려진 상태다. 아직은 보는 데 큰 지장은 없다. 하지만 솔직히 걱정이 안 될 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내 병원을 찾았다.

 # 망막 스캔을 포함해 몇 가지 기본적인 검사를 받았다. 망막 뒤에 물이 고여 있었다. 미세한 실핏줄이 터진 것 같았다. 황반변성이라고 단정짓지는 못해도 의심할 여지는 적지 않았다. 오는 월요일에 조영제를 투여한 후 보다 정밀한 검사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일상은 예정대로 돌아갔다. 메세나 대회에서 기조강연도 했고, 수단에 망고나무 심기를 돕는 자선공연에도 참석했다. ‘코리안 아이(Korean Eye)’ 등 미술전람회도 두 곳이나 찾아봤다. 특히 서울 서초동의 ‘아트 클럽 1536’에서 전시 중인 키스 소니에의 ‘형광룸’ 작품을 보면서는 일부러 형광등을 끈 채 전시작품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도 했다. 그 작품은 형광등을 켜야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그 빛이 없을 때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마치 빛이 없어 볼 수 없게 된다면 어떤 삶이 펼쳐질지 궁금했던 것이리라.

 # 그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의 단 하나뿐인 바이올린 협주곡을 서울시향과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바이바 스크리데의 협연으로 들으면서 내내 떠오른 생각은 청력을 상실해가는 베토벤의 심경이었다. 1802년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 중에 10월 6일과 10일 두 차례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는 음악가로서 청력장애가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가혹한 운명’에 무릎 꿇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 숱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1806년 작곡된 베토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역시 그러했다.

 # 내 눈은 아직 볼 만하다. 하지만 그 미래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때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안에 좌절해선 안 된다. 아니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청력을 잃었던 베토벤이 더 위대해졌던 것처럼, 백내장을 앓았던 모네가 이에 굴하지 않고 위대한 작품들을 쏟아냈듯이 장애는 우리를 때로 괴롭히고 불편하게 만들 순 있어도 결코 노예로 삼거나 불가능하게 만들 순 없다! 물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또렷하게 못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줄지는 않는다. 세상의 풍경이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해질 순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줄지는 않는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마음 나누며 살련다. 그것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