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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범이 임산부 위협하며 쓴 쇠젓가락은 흉기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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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강도가 “소리치거나 내 얼굴을 쳐다보면 눈을 찔러 버리겠다”며 방바닥에 있던 쇠젓가락을 집어 들고 20대 여성을 위협했다. 이때 쇠젓가락은 흉기일까, 아닐까. 법원은 “위험한 물건은 될 수 있지만 흉기는 아니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김인욱)는 쇠젓가락으로 위협해 임산부(23)를 성폭행하고 금품을 뺏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구모(50)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고 17일 밝혔다. 재판부는 구씨의 특수강간 혐의는 인정했지만 특수강도 혐의에 대해선 무죄로 판단하고 강도죄만 적용했다. 형법은 특수강간죄를 ‘흉기나 그 밖의 위험한 물건’을 지닌 채 강간한 경우(제4조)로, 특수강도죄는 ‘흉기’를 휴대하고 강도 행위를 저지른 경우(제334조)로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쇠젓가락은 일반인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서 그 용법에 따라 위험한 물건에는 해당할 수 있으나 흉기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흉기는 사회통념상 일반인이 그 용법에 대해 위험을 느낄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위험한 물건은 흉기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라며 “대법원 판례도 재단용 가위 등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흉기 기타 위험한 물건’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지 ‘흉기’로 파악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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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는 위험한 물건, 차 열쇠는 아니다=형법은 특수절도, 특수강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범죄에 대해 ‘흉기나 그 밖의 위험한 물건을 사용한 경우’를 가중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위험한 물건’에 대한 판례는 다양하다.

 지난 15일 대법원 1부(주심 이홍훈 대법관)는 고의로 차량을 급히 후진해 뒤 차를 들이받은 최모씨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적용해 가중처벌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춘천지법에 돌려보냈다. 자동차를 ‘위험한 물건’으로 판단한 것이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법 형사4단독 박창렬 판사 역시 ‘역주행 폭주차량’으로 사고를 일으킨 최모(20)씨에게 도로교통법 대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적용했다.

 하이힐도 ‘위험한 물건’이다. 지난해 5월 인천지법 형사8단독 장성학 판사는 8㎝ 굽의 하이힐로 20대 여성을 폭행해 한쪽 눈이 멀게 한 혐의로 기소된 임모(26·여)씨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빈 맥주병이나 양주병, 마요네즈병, 파리약 유리병, 생맥주잔 등 사람에게 집어던지거나 내리칠 경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들도 ‘위험한 물건’으로 가중처벌 대상이다.

 폭행에 이용한 도구를 ‘위험한 물건’이 아니라고 판단해 가중처벌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지난해 8월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정덕모)는 판매용 비데 2개를 종업원에게 던진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기소된 장모(31)씨에게 “플라스틱 비데는 모서리가 둥글어 위험한 물건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5㎏이 넘어 눈이나 치아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자동차와 달리 차 열쇠는 위험한 물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2008년 5월 대법원 1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자동차 열쇠로 상대방의 배를 찔러 5㎝가량의 상처를 입힌 혐의로 기소된 정모(56)씨에게 “자동차 열쇠는 사회 통념상 생명 또는 신체에 위험을 느끼도록 만든 물건이 아니다”며 상해죄만 적용했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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