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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퍼주기 경쟁에 나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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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전 중앙일보 사장

독일군과 영국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 살아있는 병사는 참호 속에서 선 채로 잠을 자야 했고 죽은 병사는 동료들이 보는 가운데 썩어갔다. 오물과 악취로 참호 주변은 뒤범벅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독일군 병사들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촛불을 붙이며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다. 영국군 병사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하나 둘씩 캐럴을 따라 부르며 적진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수천 명의 병사가 참호를 나와 적들과 악수하고 담배와 비스킷을 건네며 가족사진을 꺼내 보이고 서로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제1차 세계대전 다섯 달째인 1914년 12월 24일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꿈같은 사건이다. 『노동의 종말』을 쓴 세계적 석학 제러미 리프킨의 최근작 『공감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전장에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서로의 생존을 축하하는 이 공감의 드라마야말로 죽어가는 지구를 살릴 공감의 시대를 여는 키워드라고 본 것이다.

 “공감은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서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며 무엇이 필요한지 같이 느끼는 것”, 이것이 공감의 정치다. 민주당 손학규 신임 대표가 최근 연이어 역설한 내용이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물고 뜯는 정쟁을 끝내고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공감시대를 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지금 얼핏 보면 한국의 양대 정당이 공감의 시대에 공감의 정치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든다. 이명박 정부의 후기 정책기조가 친(親)서민 공정사회고, 손학규 체제의 민주당 기조도 친(親)서민 공감정치다. 정책 실천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서민과 중산층을 아우르는 70% 복지시대를 여는 개혁 중도 보수정당으로 다시 서겠다고 약속했고, 민주당은 의료·보육·교육 등 사회 서비스를 국민 전체에 확대하는 보편적 복지를 당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전체냐 70%냐 차이일 뿐 무상급식·무상교육·무상보육·무상의료 등 공짜 포퓰리즘 캐럴이 전국에 울려 퍼지고 있다.

 지난해 정부의 재정적자는 43조원, 국가부채는 최저 360조원에서 최고 16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추정치도 나와 있다. 10년 전보다 최소 네 배 이상 늘었다. 올해 예산 중 복지비가 115조원으로 총 지출의 35.2%다. 내년엔 여야가 힘을 모아 경쟁적으로 더 올릴 것이다. 지난 10년 진보 정권의 나눔과 베풂의 정치 속에서 곳간은 비었고 우물은 말랐다. 곳간을 채워 부를 축적하고 일자리를 늘리며 울타리를 굳게 하라고 보수정당에 정권을 맡겼는데 진보정권과 퍼주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망각에 너무나 익숙하다. 노무현 정부 말기 좌파진영은 진보 무능과 대안 부재로 자아비판의 백가쟁명에 빠져들었다. 당시 진보 성향의 경향신문 기자들이 기획 취재해 발간한 책이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좌절』이었다. 진보에 대한 반성으로 출발하면서 고달픈 서민의 삶이 참여정부 시절 더 악화됐음을 구체적 사례로 든다. 신자유주의 세력의 부상에 대처하지 못한 진보의 무능과 대안 부재를 패인으로 꼽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한, 한국 진보의 살길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진보도 퍼주기만 할 게 아니라 밥 먹여 주는 기술과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처절한 반성이었다. 불과 3, 4년 전 일이다. 이를 보수도 잊고 진보도 모른 척 퍼주기 경쟁을 하고 있다.

 브라질 대통령 룰라를 보라. 어려서부터 구두닦이와 행상으로 성장한 룰라는 빈곤의 처절한 한(恨)과 부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뭉쳐 있는 좌파 노동당 대표였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택한 경제정책은 중산층 살리기였다. 퍼주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시장친화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기아퇴치사업을 벌여 인구 10%가 넘는 2000만 명이 중산층 대열에 편입됐다. 국내총생산(GDP)은 세 배 커졌고 외환보유액은 10배 늘고 물가는 절반으로 낮아졌다. 떠나는 대통령이 80%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진보도 밥 먹여 줄 수 있다는 성공 사례를 브라질 좌파가 보여줬다.

 미래에 대한 유일한 정부 투자가 4대 강 사업이다. 이 예산을 잘라 무상복지에 쓰자는 야당이나 법인세 인하로 고용 창출하자 했던 여당이 부자감세라며 등 돌리는 이 비열한 눈치 보기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 친서민 퍼주기로 대통령 지지율 높이는 데 연연하지 말라. 친서민 공짜 복지로 좌파의 무능을 재확인하지 말라. 중소기업이 살아야 국부가 늘고 중산층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 절체절명의 명제에 보수와 진보가 공감할 때 진정한 공감의 정치, 공감의 캐럴이 울려 퍼질 수 있다.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전 중앙일보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