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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세계 수술의 ‘기준’을 만드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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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만 해도 암·심장병 등 난치병을 수술 받으려고 선진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환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수술 성적이 미국·유럽보다 앞선 분야도 많다. 매년 수백 명의 해외 의사들이 한국 수술을 배우겠다며 줄을 선다. 정부는 이 같은 의료서비스 산업을 국가 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수술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중앙일보와 아리랑TV는 공동으로 G20 의장국 해를 맞아 5부작 의학 다큐멘터리 ‘메디컬 코리아, 수술(手術)의 힘(Top MDs of Korea)’을 제작했다. 188개국 8250만 시청 가구를 확보한 글로벌 방송네트워크 아리랑TV는 이달 8일부터 매주 월요일 8개 국어로 다큐멘터리를 송출한다. 중앙일보는 이 기획의 일환으로 ‘건강한 당신’ 지면을 통해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위암수술 실력 한국이 최고” 세계 명의들이 인정

‘청출어람’. 한국 수술의 힘을 보여주는 말이다. 타고난 손재주, 신의료기술에 대한 학구열, 창의성 등을 내세운 우리나라 의사들이 세계 수술의 기준을 세우고 있다. 서울대병원 서경석 교수팀이 간암 환자인 이만덕씨의 간이식 수술을 하고 있는 모습. [프리랜서 박정우]

지난달 20~23일 캐나다 토론토 포시즌호텔. ‘위암 진료의 적정성에 대한 전문가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엔 미국 MD앤더슨의 폴 맨스필드 교수, 미국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의 대니얼 코이트 교수, 네덜란드 라이덴대학병원 반더벨트 교수, 일본 암연구회병원 다케시 사노 박사 등 4개 대륙의 위암 치료 권위자 17인이 참석했다. 한국에선 대한암학회 노성훈 이사장(세브란스병원 외과 교수)이 초청받았다. 전문가 17인은 5개월 전부터 세계 의사들에게 회의 주제와 관련된 2000여 개의 질문을 받아 검토했다. 하지만 위암 조직검사 때 정상조직도 함께해야 하는지, 암을 제거할 때 림프절을 광범위하게 절제해야 하는지 의견이 갈렸다. 결국 세계 명의들은 노성훈 이사장에게 최종 자문을 구했다. 위암 환자의 60%가 극동아시아에 있고, 그중 한국의 위암 수술 실력이 가장 우수하다는 점이 반영됐다. 노 이사장은 “한국에선 위 정상조직을 검사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림프절을 절제하는 수술을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노 이사장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이 내용을 포함한 위암 진료의 가이드라인은 곧 세계적인 의학저널 ‘임상종양학회지’에 게재될 예정이다.

매년 해외의사 수백명 한국 와서 노하우 배워

동서신의학병원 김기택 교수팀이 수술한 척추측만증 환자의 수술전(위)과 후 X-선 사진.

한국 수술의 힘이 대단하다. 세계 수술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의사들은 ‘수술 DNA’를 타고난 것일까.

로봇수술 등 신기법 익힌 뒤 ‘한국형’ 재창조

대한외과학회 이민혁 이사장(순천향대병원 외과)은 “한국 의사들은 신의료기술에 대한 학구열과 집중력이 높아 단기간에 수술 경쟁력을 쌓았다”고 말했다. 여기에 타고난 손재주, 병원들의 과감한 시설 투자, 산업발전 등이 어우러져 이뤄낸 값진 결과다.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다.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이재담 교수는 “1990년대 급속한 경제발전과 거대 기업자본을 바탕으로 한 대형 병원들이 들어서며 선의의 경쟁이 시작된 것도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특히 한국인 특유의 창의성이 보태지며 수술 경쟁력에 꽃을 피웠다. 대한암학회 노성훈 이사장은 “한국 의사들은 선진국의 수술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형 수술 기법을 재창조하는 힘이 크다”고 분석했다.

 세계적인 위암 수술 권위자인 노 이사장도 수술 재창조의 달인이다. 그는 수술 시 메스를 쓰지 않고(전기소작기 사용), 환자의 배 속에 찬 가스와 물을 배출하기 위해 교과서처럼 적용했던 콧줄과 배액관을 쓰지 않는 ‘3무(無) 수술을 개발했다. 매년 세계 의사들이 이 수술법을 배우려고 그를 찾는다. 최근 우리나라가 재창조하고 있는 수술 분야는 로봇수술. 로봇수술을 개발한 선진국에선 전립선·대장·직장 수술에 국한해 적용한다. 하지만 로봇수술 시작 5년밖에 되지 않은 우리나라는 갑상선·위·산부인과·이비인후과까지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다음 단계는 ‘수술 임상시험’ 도입

단기간에 수술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우리나라가 단지 메스로 째고 봉합하는 기술만 늘었을까. 아니다. 수술 실력이 정교하고 다양한 진료과가 협진하는 시스템이 정착하며 치료 성적도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특히 암·장기이식·심장·척추·치료 성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식수술과 함께 현대의학의 꽃으로 불리는 암 수술 성적은 우리나라 수술 발전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2009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국내 발병 1위인 위암의 2003~2007년 5년 생존율은 61.2%로 미국(1999~2005년)의 25.7%보다 월등히 높다. 간·자궁경부·대장·갑상샘·유방·폐·췌장·전립선 등 주요 9대 암의 생존율도 미국보다 앞서거나 대등하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기준 우리나라 의료서비스산업 기술 경쟁력은 이미 미국의 76%, 일본의 85%, 유럽의 87% 수준에 올라섰다. 현재는 경쟁력이 더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엔 ‘수술 임상시험’에 눈을 돌리며 ‘수술 초일류 선진국’에 합류하기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다. 미국처럼 수술 초일류 선진국에선 60년대부터 수술 임상시험을 통해 환자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치료 효과는 끌어올릴 수 있는 수술법을 연구하고 있다. 미국 국립유방암임상연구협회(NSABP)가 유방암환자의 유방을 모두 절제했을 때와 암 부위만 부분 절제했을 때의 환자 생존율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밝히며 ‘유방 부분 절제술’이 보편화한 게 대표적인 예다.

 한국도 수술 임상시험의 닻이 올렸다. 대한외과학회 이민혁 이사장은 “국내 수술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고 국제사회에 수술 표준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국가적인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황운하 기자
사진=프리랜서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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