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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방샤방 초식형, 강렬한 육식형 … 온갖 음악의 공존지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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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호 20면

지난달 30일 홍대 앞 클럽 ‘M2’에 모인 1000여 명의 사람이 일렉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자정부터 붐비기 시작한 클럽은 오전 2시가 되자 꽉 찼다. 신인섭 기자

록밴드 ‘아침’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 권선욱(27)씨는 청바지에 티 차림으로 기타를 멘 채 다가왔다. 지난달 29일 저녁 클럽 ‘FF’에서 막 공연을 마친 그는 평범한 대학생 같았다. “음악 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 모두 모여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음악씬’이 만들어진 곳이 홍대다. 여러 사정이 힘들지만 지금 여기에서 좋아하는 록을 할 수 있어서 즐겁고 행복하다.” 그는 홍대 앞 클럽을 이렇게 설명했다. 옆에 서 있던 멤버 김수열(27·드럼), 김동현(21·기타), 박선영(26·베이스)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거들었다. 그들에게 다른 클럽 공연을 보러 가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차 끊기기 전에 집에 가야죠. 홍대의 밤을 즐기기엔 다들 집이 너무 멀답니다(웃음)”라고 답했다.

정열과 음악의 용광로 홍대 앞 클럽 60곳

라이브 클럽 취재에 동행한 ‘장기하와 얼굴들’의 레이블 ‘붕가붕가 레코드’ 고건혁(29·사진) 대표는 “홍대씬에 데뷔하면 처음엔 보통 화·수요일 클럽 무대에 서요. 그러다 이름이 알려지면 주말 밴드가 되고 여러 곳에서 섭외가 들어오죠”라며 “장기하와 얼굴들은 1년 정도 홍대 클럽에서 공연했어요. 인디, 복고 정서가 대중성과 잘 맞아떨어져 처음부터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래서 기획공연도 빨리 잡혔죠. 하지만 홍대 밴드는 홍대 안에서만 소비돼요. 그게 이곳의 한계죠. 장기하도 진짜 뜬 건 지상파에 소개되면서예요”라고 했다. 공연이 끝나고 클럽을 빠져나오는 관객 중 한 무리의 직장인을 만났다. 동료 5명과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는 회사원 국승신(31)씨는 “홍대에 회식하러 왔다가 클럽데이라고 해서 처음 클럽에 와 봤어요. 아는 밴드도 없고 젊은 애들만 있을 줄 알고 겁이 났는데 막상 와 보니까 너무 신나네요”라고 말했다.

오후 11시10분 고건혁 대표과 함께 클럽 드럭(DGBD)으로 자리를 옮겨 또 다른 밴드의 공연을 지켜봤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을 배출한 홍대 최초의 라이브 클럽 드럭은 1994년 7월 문을 열었다. 클럽을 만들어 2008년까지 드럭을 운영했던 이석문(50)씨는 “원래는 펑크음악을 전문적으로 틀어주는 클럽이었는데 여기 오는 매니어 중 몇 명을 모아 ‘드럭밴드’를 만들었어요. 이 밴드로 95년 4월 커트 코베인 사망 1주기 추모 공연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공연을 상설화했죠”라고 말했다. 공연 후 당시 고3이던 크라잉넛 멤버들이 이씨를 찾아왔다.

“여기서 밴드 하고 싶다고 왔어요. 그래서 수능 끝나고 다시 오라고 했더니 정말 겨울에 찾아왔죠. 굉장히 특이했는데 잠재력이 보이더라고요. 잘만 다듬으면 뭔가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선발했어요.” 드럭은 96년 홍대 주차장거리와 명동에서 열린 ‘스트리트 펑크쇼’를 계기로 홍대 펑크음악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된다. 싱어송라이터 이상은(40)씨는 “홍대는 새로운 욕구들이 응집되는 공간이에요. 그래서 인디음악처럼 자유도가 높아 표현력이 풍부하고 시대정신을 얘기할 수 있는 장르가 나타날 수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96~99년 사이 홍대 주변에는 ‘프리버드·재머스·롤링스톤즈·스팽글·코다·마스터플랜·피드백·플레이하우스·슬러거’ 등의 라이브 클럽이 등장한다. 3호선 버터플라이 보컬이자 음악평론가 성기완(43)씨는 20여 년간 홍대에서 음악을 해 오고 있다. 그는 “90년대 초반 홍대는 땅값이 비싸진 신촌의 대안 개념으로 등장했다.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예술전문가 집단과 록음악의 저항정신이 결합하면서 새롭고 자유로운 청년 문화공간으로 태어났다. 특히 90년대부터 문화에 대한 다양한 취향이 생기면서 자기만의 취향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홍대로 몰려왔다”며 “다양한 음악이 있었지만 크게 보면 펑크와 모던록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브 클럽 공연은 1시가 넘어 끝났다. 근처 카페에서 고건혁 대표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베이시스트 황현우(28)씨를 만났다. 10여 년간 홍대에서 인디음악을 하고 있다는 황씨는 “전에는 홍대에서 음악 한다고 하면 ‘거기서 술 먹나?’라면서 무시하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공연하는구나’라고 인정해줘요”라며 홍대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고 대표와 황씨에게 현재 홍대씬의 흐름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이란 말이 나올 만큼 홍대에는 다양한 음악이 있어요. 굳이 나누면 초식형·육식형·잡식형 음악이 있는 것 같아요.

초식형은 20~30대 여성이 좋아할 만한, 가사가 잘 들리고 샤방한 느낌의 음악, 육식형은 흔히 록이라고 부르는 액션이 크고 강한 음악, 잡식형은 그 사이의 음악이에요. 과거엔 어떤 밴드가 어느 형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요즘 밴드들은 장르를 규정하지 않고 여러 범위를 넘나들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 힘드네요”라고 답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홍대 앞은 더욱 번잡해진다.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몇몇 댄스클럽 앞에 줄을 선다.

한 장의 티켓으로 여러 클럽에 입장할 수 있는 ‘클럽데이’에는 그 숫자가 더욱 많아진다. 지난달 30일 0시50분, 6년째 홍대 클럽을 찾는다는 영화 마케터 이은진(25)씨와 댄스 클럽 M2를 찾았다. 그는 “전이나 지금이나 홍대 클럽 음악은 ‘일렉’과 ‘힙합’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음악이 더 세분화돼 자기 취향에 따라갈 수 있는 클럽이 많아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에는 1000여 명의 사람이 바짝 붙어 하나의 리듬 패턴이 반복되는 전자음악에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M2를 운영하는 유백열(사진) 사장은 매주 토요일 DJ로 활동하고 있다. 1m80㎝가 훌쩍 넘는 키에 노란 머리를 하고 위아래 검은 옷으로 맞춰 입고 클럽에 나타난 그는 “80년대 초반엔 지금 같은 클럽이 아니라 나이트 같은 클럽이 있었어요. 당시 뉴웨이브나 디스코가 유행이었는데 종로에 ‘크리스털’이란 클럽에서 DJ를 시작했어요. 그러다 80년대 중반 서교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으로 옮기면서 홍대 생활이 시작됐지요”라고 말했다.

유 사장은 92년 홍대 앞에 ‘시티비트’라는 레코드숍을 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틀 음악을 찾으러 여기저기 다니다 제대로 된 레코드가게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으로 가게를 차린 것이다. “그때 홍대에 클럽이 막 생기기 시작했어요. 거기랑 방송국, 강남카페에 음반을 많이 대줬죠.”

2000~2002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소속으로 홍대 클럽문화 조사를 진행했던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이무용(43) 교수는 2일 전화통화에서 “원래는 홍대보다 신촌에 록카페가 많았다. 90년대 초 홍대 지역에 댄스클럽이 등장하게 된 것은 80년대 말 경제 호황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로 인한 유학생 급증과 해외 동포들의 귀국으로 인해 외국의 문화가 홍대로 많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대 미대의 존재가 컸다. 개성 있고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 집단이 모여 창작하는 공간이 클럽의 모태가 됐다. 92년 생긴 ‘발전소’는 작업실 겸용으로 기획됐다. 당시 ‘발전소나 스카, 아이비 같은 클럽에선 록, 재즈, 발라드, 클래식이나 간간이 테크노 음악까지 틀었다. 손님들은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다가 흥이 나면 일어나 춤을 췄다”고 말했다.

이후 홍대에는 95년을 기점으로 ‘상수도·M.I·조커레드·흐지부지·언더그라운드·후퍼·황금투구·마트마타’ 등의 댄스클럽이 등장한다. 유 사장은 95년 ‘M.I(2004년 마트마타와 합쳐져 M2가 됨)’를 열었다. 그는 “이전까지 DJ의 역할은 판만 갈아주는 거였어요. 이때부터 믹스가 시작됐죠. 클럽을 연 뒤 테크노나 트랜스 같은 ‘일렉’ 음악을 주로 틀었는데 처음엔 사람들이 낯설어했어요. 97, 98년이 돼서야 반응이 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일렉’은 홍대 클럽의 대표 장르 중 하나예요. 지금은 그 안에서 수많은 변형이 일어나죠. 홍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걸 만들어 내야 해요. 누가 언제 짠 하고 새로운 걸 가지고 나올지 모르는 곳이 홍대니까요”라고 말했다. 다국적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독일인 다비드(26)는 2009년 초 한국에 왔다. 홍대 클럽에 자주 간다는 그는 “젊은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홍대 클럽이다. 그만큼 외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곳이다”고 했다.

클럽을 빠져나오는 길에 3명의 여성이 클럽 입구에서 안전요원과 실랑이를 하는 장면을 봤다. 미성년자였던 그들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입장하려다 발각된 것이었다. 검은 정장에 무전기를 든 안전요원은 “주민등록증까지 위조해 오는 애들도 있는데 아주 철저하게 검사해요. 미성년자 받았다 단속당하면 클럽 입장에선 잃는 것이 더 많거든요”라고 말했다.

새벽 2시 M2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클럽 ‘nb2’로 향했다. 99년 문을 연 이 클럽은 힙합음악을 틀어주는 곳이다. 일렉을 트는 M2와는 달리 묵직한 베이스와 멜로디라인이 어우러진 비트 위에 랩이 들렸다. 클럽 안은 앞으로 걸어나가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외국인도 눈에 많이 띄었다. 대학생 김은정(22)씨는 “클럽데이라 여러 클럽을 옮겨다니고 있다. 클럽마다 컨셉트가 달라 다양한 음악에 춤을 출 수 있다”고 말했다.

클럽데이에 참가하는 20여 개 클럽이 가입된 클럽문화협회 장양숙(38) 총무는 “클럽데이를 계기로 소수 매니어의 문화였던 클럽이 대중에게 다가가면서 클럽 전체의 파이가 커졌다. 2000년대 중반 대형 클럽이 등장하면서 홍대 클럽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났다. 클럽데이 수익은 n분의 1로 나누기 때문에 작은 클럽 입장에선 클럽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 홍대 클럽이 함께 생존하자는 의도가 담긴 이벤트”라고 말했다.

▶클러버: 클럽에 출입하는 사람 ▶인디: 인디펜던트 음악의 줄임말. 상업적인 음악 세계와 거리를 두고, 대중성보다는 뮤지션의 개성에 따라 독창적인 음악을 추구함 ▶일렉: 일렉트로닉 음악의 줄임말. 컴퓨터로 만든 전자음악. 보컬을 최대한 배제하고 동일한 패턴의 리듬이 반복되는 음악 ▶음악씬: 음악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이는 곳 ▶레이블: 음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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