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현장 400곳 맨 먼저 출동해 범인 흔적 찾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말해보세요.’ 지난달 25일 자정쯤 경기도 부천시의 한 오피스텔.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 50대 남성 앞에서 한 여성이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올린 뒤 나지막이 읊조렸다. 경기경찰청 과학수사계(CSI) 소속의 유일한 여성 검시관 이현주(41·6급·사진)씨다.

 이씨는 살인 사건 현장에서 누구보다 먼저 피해자와 마주한다. 1차 검시로 현장에 남아 있는 생리학적 증거를 확보하는 게 임무다. 그가 수집한 기초자료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법의관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의 사연을 밝혀내고 수사관들이 범인을 추적하는 데 꼭 필요하다.

 25일 사건 현장을 조사한 그는 수사관들에게 ‘면식범에 의한 타살’이라고 의견을 냈다. 현장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핏자국을 씻으려 한 흔적 등이 발견되는 등 증거를 훼손하려 한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이틀 뒤 붙잡힌 용의자는 이씨의 예상대로 피해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였다. 이씨는 중환자실 근무 경력 15년의 베테랑 간호사였다. 2005년 검시관 제도를 도입한 경찰이 외부 전문가들을 채용할 때 일반직 공무원으로 입문했다. 현재 전국에는 57명의 검시관이 있다. 경기경찰청에는 6명이 있는데 그가 최고 선임자다.

 “간호사 시절 성폭행당한 아홉 살짜리 여자 아이의 수술을 도운 적이 있었어요. 몸에 난 큰 상처를 보고 아이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범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제 의료 지식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부터였죠.”

 검시관 활동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훼손된 시신에 적응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 현장 호출도 두 아이의 엄마인 이씨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던 건 경찰관인 남편의 ‘외조’ 덕분이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새벽에 들어오는 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남편의 배려 덕분에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2005년부터 최근까지 400여 건 이상의 검시를 했다. 안양의 혜진·예슬양, 연쇄살인범 강호순에게 목숨을 빼앗긴 여성들, 이 그의 손을 거쳤다. 인기 미국 드라마 ‘CSI 마이애미’의 여성 검시관 알렉스 우즈가 숨진 피해자와 대화하듯이 검시를 하는 것처럼 그도 마음속으로 사자와 대화를 한다고 한다. “숨진 피해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진실을 밝혀달라고 말이죠.”

 4일 제61주년 과학수사의 날을 맞은 이씨의 감회는 남다르다.그는 “알렉스 우즈만큼 섬세하고 인간적이면서도 능력 있는 검시관이 되고 싶다” 고 말했다.

수원=유길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