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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 영화, 만들기보다 '막기'가 힘드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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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리들리 스콧(68) 감독은 7일 도쿄에서 열린 ‘킹덤 오브 헤븐’(5월 개봉) 로드쇼에서 30분짜리 가편집본을 직접 들고 왔다. 동영상 유출을 막으려고 감독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칠순을 앞둔 거장이 보안을 위해 수고로움을 자청할 만큼 불법 동영상은 영화계의 골칫거리가 됐다. 우리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한 영화 관계자는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외화의 경우 관객 30∼40%를 불법 동영상에 뺏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마다 불법 동영상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올 설 연휴에 개봉한 영화 '피닉스'는 전국 관객 8만 명을 겨우 넘겼다. '피닉스'를 수입한 이십세기폭스는 흥행 부진을 온라인 탓으로 돌린다. 개봉일 즈음엔 하루 300건 이상 적발되는 등 총 2000건 이상의 불법 파일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이십세기폭스 허인실 대리는 "적발된 게 이 정도니 어마어마한 양의 불법 파일이 돌아다녔을 것"이라며 "영화의 주요 타깃이 불법 동영상을 자주 이용하는 10~20대와 겹쳐 피해가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사들은 대행사를 고용해 불법 파일을 찾아낸다. 포털 사이트에서 불법 파일을 적발하면 삭제하고, 상습적으로 올리는 악성 회원을 제명하도록 해당 사이트에 요구한다. 적발이 사실상 불가능한 개인파일교환(P2P)사이트에는 가짜 동영상을 올려 교란작전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비용 대비 효율은 떨어진다"는 게 영화사들의 한결 같은 푸념. 아무리 찾아내도 사막에서 모래알 몇 개 주어다 버리는 격이라는 것이다.

따끈따끈한 할리우드 영화뿐 아니라 외국보다 통상 1~2년 후 개봉하는 예술영화는 타격이 더 크다.

백두대간 김은경 이사는 "지난해 말 개봉한 2001년도 영화 '노맨스랜드'가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포털 사이트 검색순위 20, 30위권에 올라 흥행을 기대했는데 결과는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며 "해당 파일을 찾느라 검색순위가 올라갔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동시개봉이 살 길이다=아무리 할리우드 직배사라고 해도 국내 마케팅 전략이나 절차상의 문제로 미국과 동시개봉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2003년부터 동시 개봉이 부쩍 늘었다. 특히 올해 그 추세가 두드러진다. 워너브라더스의 '콘스탄틴'은 미국보다 사흘 앞서 개봉했고, 이십세기폭스는 미국보다 하루 앞서 5월 5일 개봉하는 '킹덤 오브 헤븐'을 포함해 '스타워즈 에피소드 Ⅲ-시스의 복수'(5월 19일)와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6월 10일)'판타스틱 4'의 네 작품을 동시개봉하기로 했다. 직배사가 아닌 국내 배급사가 수입하는 '호스티지'도 미국보다 불과 일주일 늦은 18일 개봉한다.

국내 심의 일정상 동시개봉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지만 불법 동영상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다. 그래서 때론 편법도 쓴다. 자사의 다른 영화로 일단 등급 심의를 넣은 후 심의 직전 동시개봉하는 영화와 바꿔치기하는 소위 '순번 교체'다. 자막 넣은 프린트와 대본을 제출해 신청한 지 한 달 뒤에야 심의를 받는 일정에 따르면 동시개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법 동영상의 주요 피해자는 아직 외화. 하지만 한국영화 수출이 급증하고 있는 요즘, 불법 파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외국에선 한국영화가 비슷한 피해를 보고 있다. 배용준 주연의 '외출'이 9월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9개국 동시개봉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명 쓰고, 광고하고, 시사회 하고='자동차를 훔치거나 지갑을 훔치거나 텔레비전을 훔치는 것처럼 불법 동영상으로 다운로드 받는 것은 불법, 불법입니다'. 지난달부터 전국 주요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 틀어주는 공익광고다. 미영화협회(MPA.Motion Pictures Association)에 가입된 한국 직배사들이 연합해 극장 측에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큰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건 영화사도 안다. 그래서 애초에 유출이 안 되도록 최대한 신중을 기한다. 내부에서 파일을 주고 받을 때, 예를 들어 '스타워즈'대본파일을 보낼 때조차 '감사편지'식의 제목을 다는 식이다. 필름을 비디오로 뜨는 과정에서 불법 복제가 많이 이뤄지기 때문에 드림웍스에 지분 투자한 CJ엔터테인먼트는 비디오 홍보물마저 미국 본사에서 직접 받는다.

'하나와 앨리스''코러스'의 홍보.마케팅을 담당했던 젊은기획 이보나씨는 "대안이 없을 바엔 차라리 선수를 치자는 게 요즘 마케팅 전략"이라고 말했다. 관객을 오프라인으로 끌어내자는 생각에 '코러스'는 시사회에 1만6000명을 초청했다. 13일 현재 실제 관객이 10만명을 기록해 과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영화사.비디오사의 모임인 한국영상협회는 불법 파일, 혹은 이용자를 고발할 경우 고액의 포상금을 지급할 것을 검토했으나 회원사의 참여 미비로 구상에 그친 상태다. 영상협회 김의수 온라인팀장은 "회원사 연합 차원의 유료 사이트 개설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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