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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가 미국 진출하듯 한국 걸그룹이 일본 침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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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호 06면

소녀시대가 올 8월 도쿄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 열린 첫 일본 쇼케이스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29일 저녁 일본 도쿄 국제포럼 홀. 한국 대중음악 쇼케이스 ‘K팝 나이트 인 재팬’이 열렸다. 걸그룹 ‘포미닛’을 비롯해 씨스타·티맥스·백지영 등 한국 가수들의 본격적인 일본 활동을 알리는 자리다. K팝 스타들이 무대에 오르자 5000여 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환호했다. 가수들은 대부분 한국어로 공연했고, 일본인 관객 역시 능숙하게 한국어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야광봉을 흔들며 “오빠!” “언니!” “멋있어요!”를 연호하는 10~20대 팬들이 눈에 띄었다. 이날 5000여 좌석은 예약 시작 30분 만에 동났다. 일본에서 불고 있는 K팝 열풍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일본 열도 휩쓰는 신한류, 걸그룹과 K팝의 힘

29일 도쿄 국제포럼에서 열린 ‘K팝 나이트 인 재팬’에서 열창하고 있는 걸그룹 포미닛. 한국 걸그룹 특집 기사를 실은 일본 잡지들.

27일 오후엔 도쿄 신주쿠역 광장에서 포미닛의 게릴라 콘서트가 펼쳐졌다. 일본 싱글 음반 ‘퍼스트’ 발매를 기념한 이날 콘서트에는 5000명이 몰려들었다. 차도까지 차지한 팬들이 ‘포미닛’을 연호하자 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한동안 콘서트가 중단됐다.
28일 밤 도쿄의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신오쿠보. 지난달 문을 연 ‘K팝 라이브’ 무대에 신인 남성 5인조 그룹 ‘KINO’가 등장하자 공연장을 가득 메운 100여 명의 일본 여성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은 제각각 자기가 좋아하는 멤버의 이름을 쓴 부채나 야광봉 등을 흔들며 성원한다. 이들은 동방신기·샤이니·2PM의 한국 가요까지 따라 부른다.

이곳은 일본의 K팝 붐을 타고 생긴 일본 최초의 한국가요 전용 공연장이다. 지난달 처음 무대에 선 KINO는 아직 음반을 한 장도 내지 않은 무명 그룹이다. 하지만 신오쿠보 일대 여성 한류팬들 사이에선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한류 스타다. ‘K팝 in Okubo’의 머리글자를 따서 KINO라는 이름을 지었다. 무대 데뷔 한 달반 만에 유료 팬클럽 회원만 600명이 생겼을 정도다. 주 5일, 하루 3차례 공연하는데 매회 100석 표가 모두 매진된다. 11월 말엔 1500명 정도를 수용하는 큰 무대에서 팬미팅을 겸한 콘서트를 계획 중이다. KINO가 지향하는 컨셉트는 일본에서 출발한 친근한 한류 스타다.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오디션을 통해 1000명 가운데 5명을 뽑았다. 무대에서 토크쇼를 할 정도로 일본어도 능숙하다. 출판사 직원이라는 20대 여성 이토 미카(伊藤美香)는 “동방신기·샤이니 등 남성그룹을 좋아해 한 달간 매일 공연장에 왔다. 가까이에서 좋아하는 한국 곡을 원 없이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K팝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있다. 그 중심엔 소녀시대와 카라·포미닛 등을 앞세운 한국 걸그룹이 있다. 소녀시대는 26일 일본에서 두 번째 싱글 ‘지(Gee)’를 낸 지 엿새 만에 일본 최고 권위의 음반판매조사 차트인 오리콘의 데일리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일본에 진출한 한국과 아시아 여성그룹을 통틀어 처음이다. 이날 소녀시대는 오리콘 위클리 싱글 차트 2위에도 올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여성그룹 사상 최초로 오리콘 위클리 싱글 차트 톱3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1980년 12월 영국 5인조 여성그룹 놀란스가 ‘원티드’로 2위를 기록한 이래 외국 가수로는 30년 만이다. 일본의 연말 최고 이벤트인 NHK 홍백가합전에도 출전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 공영방송인 NHK가 이례적으로 프라임 타임 뉴스에서 톱기사로 소녀시대의 쇼케이스를 보도하는가 하면,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60년대 비틀스의 미국 진출을 빗대 “한국 걸그룹이 일본을 침공할 것”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지난달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 5인조 남성그룹 KINO가 28일 K팝 전문공연장인 K팝 라이브에서 생일을 맞은 여성 팬을 위해 축하노래를 부르고 있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일본 대중음악 전문가들은 K팝 열풍을 ‘신한류’라 부른다. TV드라마·영화로 시작된 한류가 본격화할 때 40~50대 중년 여성들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의 K팝과 걸그룹의 열기는 일본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10~20대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 반대로 일본의 걸그룹을 대표하는 AKB48은 남성 팬이 절대 다수다. 귀엽고 친근한 동네 여동생 같은 이미지를 지향하는 AKB48에 비해 한국의 걸그룹은 폭발적인 가창력, 체계적이고 오랜 훈련을 거쳐 완성된 화려한 댄스로 무장했다. 젊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늘씬한 몸매와 도회적인 외모도 한몫한다. ‘가와이이(귀여운)’ 스타보다는 ‘갓코이이(멋진)’ 스타를 동경하는 젊은 여성들의 심리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K팝은 스타일과 음악성, 춤, 외국어로 무장된 연예인 후보 층이 두터운 게 특징”이라고 일본 연예기획사 ‘에이벡스’의 스기모토 마사키 마케팅 부장은 분석한다. 데뷔 이전 기획단계부터 글로벌 시장 진출을 전제로 육성하는 선진 시스템이 오늘날 K팝 붐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한국 걸그룹 따라 하기는 일본 젊은 여성들의 문화를 급속도로 바꾸고 있다. 각종 잡지들은 소녀시대와 카라·포미닛의 춤과 화장, 패션을 소개하는 지면들을 앞다퉈 제작하는가 하면 한국 여성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액세서리를 즐겨 하는지 한국의 트렌드를 시시콜콜하게 소개하고 있다.

K팝 붐의 특징 중 하나는 한국의 노래와 안무·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이다. 과거 일본에 진출한 K팝 가수들이 일본어 가사로 노래를 부르거나 일본 가요를 부른 한국 가수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일본 팬들은 K팝의 한국어 가사 그대로 노래하길 원한다. 지금까지 한수 아래로만 여겼던 한국 문화에 대한 일본 사회의 평가가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한·일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2002년 월드컵 공동유치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겨울연가’를 비롯한 한류 드라마가 일본을 강타한 뒤 곧바로 보아와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동방신기의 데뷔는 ‘한국가요=트로트’로만 인식했던 젊은 여성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걸그룹 열풍은 올봄 동방신기 해체 이후, 다른 K팝 아티스트로 눈을 돌린 동방신기 팬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게 일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드라마·영화로 불붙은 한류가 동방신기(남성 그룹)를 거쳐 걸그룹으로 이어지는 윈윈 작용을 하는 셈이다. 올 연말엔 비스트와 샤이니·2PM 등 남성 댄스 그룹들이 대거 진출할 계획이어서 K팝 열풍은 지속될 전망이다.

주목할 부분은 K팝에 열광하는 10~20대 여성들이 40~50대 한류팬 엄마들을 보고 자란 세대라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한국 드라마와 음식·한국어에 친숙한 세대다. 2002년 월드컵 이전에는 재일동포와 한국인 유학생, 주재원 가족 등 한인을 상대로 했던 신주쿠·신오쿠보 일대의 한국 가게엔 부쩍 일본인 손님들이 늘었다.

경제 주간지 닛케이 비즈니스는 지난달 27일자에서 ‘삼성을 이을 한국의 급성장 기업’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잡지는 삼성의 뒤를 이을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소녀시대를 비롯한 한국의 걸그룹들을 손꼽은 뒤 이들의 인기비결을 분석했다. 늘씬한 다리를 강조한 의상과 가창력, 빠른 템포의 친숙한 멜로디, 외국인이라도 한번 들으면 누구나 흥얼거리게 되는 후렴구, 글로벌시장 진출을 염두에 둔 체계적인 인재 육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현지화 ▶기술 향상 ▶철저한 관리의 키워드로 대변되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의 전략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한국 연예계가 국가와 세대에 관계없이 폭넓은 팬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획상품을 속속 개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닛케이 비즈니스는 그러면서 “일본은 더 이상 새로운 상품을 세계시장에 내놓지 못하는 제품의 갈라파고스화가 진행됐다”며 “1억 인구의 큰 시장에 안주하는 것이 일본의 연예인이나 기업의 해외 진출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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