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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댔다 하면 관람객 수십만, 블록버스터 전시의 개척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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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호 12면

파리에서 10년간 유학했다는 말에 전공이 미술이었느냐고 물었다. 그의 전공은 미술이 아닌 경제학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 미술 관련 일을 시작했다. 미술전시 기획사 ‘지엔씨미디어(GNC Media)’의 홍성일(52·사진)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2000년 10월 ‘오르세 미술관 한국 전-인상파와 근대미술’을 열었다. 4개월간 42만 명의 관람객이 찾은 이 전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국제 전시회였다. 이 전시를 계기로 한국 미술계에선 세계적인 미술관의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하는 일명 ‘블록버스터’ 전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홍 대표는 ‘장 프랑수아 밀레 전(2002~2003년, 33만 명)·서양미술 400년 전(2004~2005년, 45만 명)·루브르 박물관 전(2006~2007년, 68만 명)·오르세 미술관 전(2007년, 47만 명)·퐁피두센터 특별 전(2008~2009년, 38만 명)·영국 근대회화 전(2010년, 15만 명)’ 등의 전시를 성공적으로 열었다. 11월 5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릴 ‘베르사유 특별전’ 준비에 한창이던 지난달 24일 오후 3시 홍 대표를 마포구 서교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오르세·루브르·퐁피두 한국전시 개최한 GNC미디어 홍성일 대표

-2000년 한국에선 최초로 대형 국제 전시(오르세 미술관 전)를 열었습니다.
“1983년부터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경제학으로 학부, 석·박사를 마쳤어요. 한국에 돌아와 외국 책·미술 작품 저작권 사업을 하다 전시기획도 시작하게 됐죠. 첫 전시를 어떤 미술관으로 할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러다 만약 파리에서 딱 한 미술관만 다녀오라고 한다면 어디를 갈까를 생각했어요. 오르세 미술관이었죠. 1년간 협상 끝에 따내 2000년에 국내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죠. 그땐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했어요. IMF 외환위기인데 수십억짜리 국제 전시라니… 하지만 저는 성공을 확신했어요. 우리나라도 대형 미술전시가 성공할 수 있는 수준에 왔다고 판단했거든요.”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전시 때 한국에 온 작품들 가격이 각각 약 7000억, 8000억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전시가 결정되면 먼저 작품을 정해요. 그러고 나서 선정된 작품이 국외여행이 가능한가 검사하죠. 모나리자는 상태가 좋지 않아 이 단계에서 계속 탈락하고 있어요. 보수를 마치면 작품 가격을 책정하는데 보통 실제 가격보다 낮게 책정되죠. 예를 들어 밀레의 ‘만종’을 1000억이라고 책정했다고 합시다. 이 가격이면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겠죠. 미술관에서 팔지도 않겠지만 실제는 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돼요. 이 과정이 중요한 것이 책정 가격을 기준으로 보험료가 산출돼요. 그래서 우리는 가격
을 낮추려고, 현지 미술관은 높이려고 기 싸움이 대단하죠.”

2006~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루브르 박물관 전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전시장 입구에 줄을 서 있다. 68만 명이 이 전시를 관람했다.

-작품을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케이스를 따로 만들지요. 몇 억씩 하는 케이스도 있어요. 케이스에 넣으면 어떤 충격이나 온도, 습도에도 문제 없어요. 높이가 2m80㎝ 넘는 작품은 비행기에 태울 수 없어요. 비행기 화물칸에 안 들어가거든요. 꼭 가져와야 하는 그림은 재질과 상태를 보고 눕히거나 뜯어 말아서 가져와요. 작품이 타는 곳에는 무조건 미술관 담당자 1~2명이 함께 움직여야 해요. 작품과 목숨을 같이하는 거죠. 물론 작품이 언제, 어떤 항공을 타고 가는지는 절대 극비 사항이에요.”

-영화에서처럼 작품을 운송할 때 작품을 싣지 않은 트럭도 함께 다니나요.
“ 무진동 트럭으로 작품을 운반하는데 이땐 꼭 2~3대가 함께 가요. 가짜 트럭도 부르는 거죠. 루브르나 오르세의 작품이 외부에 나오면 일단은 도난 위험 상황으로 간주해요. 미술관에 도착한 후엔 케이스를 바로 열지 않아요. 케이스째 그대로 항온·항습실에 넣죠. 케이스 자체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건데 72시간 동안 넣어둬요. 작품과 함께 온 미술관 관계자들한테는 이 72시간이 휴가인 셈이죠(웃음).”

- 대형 전시 기획을 오래 하다 보면 성공이 보장되는 작가나 화파가 보일 것 같습니다.
“반 고흐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든 성공해요. 반 고흐 전시를 하려면 무조건 네덜란드에 있는 두 군데 미술관 그림을 가져와야 해요. 거기에 주요 작품이 다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 전 세계 미술관이 다 똑같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웃음). 한국 사람들은 특히 인상파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2000년대 중반까지 대형 전시는 인상파가 많았어요. 돈이 되기 때문이겠죠.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관객들의 수준이 많이 높아진 것 같아요. 이제는 다양한 화가나 화파의 그림도 부담 느끼지 않고 잘 받아들여요.”

-외국의 유명 미술관 작품을 빌려오려면 비용이 많이 들 거 같은데요.
“정확히 말하면 ‘대여료(loan fee)’라는 항목은 없어요. 문화 기부금이나 작품 보존 처리·수리 비용, 전시 준비 보조금 등을 지원해요. 대부분의 경우 작품의 보존 처리 비용을 지원하죠. 프랑스 미술관 입장에선 해외전시를 계기로 작품을 빌려 주면서 공짜로 작품 수리를 받는 셈이죠. 대규모 국제 기획전의 경우 편차가 심하긴 하지만 30억~35억 정도의 예산이 들어요. 이 중 20%는 문화기부금이나 작품 보존 처리·수리비, 20%는 작품 포장·케이스, 운송비, 20%는 보험료, 나머지 40%는 한국에서 전시 진행하는 데 들죠.”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전시기획은 어느 정도로 평가받나요.
“10여 년 전 제가 시작할 때는 한마디로 최악이었어요. 무엇보다 분단국가라는 점이 컸어요. 2000년 오르세 미술관 전시 때 그쪽에선 한국이 분단국가라서 언제 전쟁 날지 모른다. 전쟁이 나면 한국 국적기는 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기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처음에 프랑스 국적기를 이용하면 계속 이용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끝까지 싸워서 결국 우리 국적기를 이용하게 됐어요.”

-광고는 크게 해놓고 정작 유명 작품은 한두 개 밖에 없다며 블록버스터 전시에 대해 불만을 말하기도 합니다.
“유명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끼리는 작품 교류가 수월해요. 이번에 세잔을 빌렸으면 다음엔 내가 가지고 있는 르누아르를 빌려주면 되니까요. 이건 서로 동급의 좋은 작품을 소장할 때 얘기죠. 동양에선 이것이 가능한 미술관이 하나도 없어요. 출발부터 쉽지 않은 거죠. 물론 수익성만 추구하면서 내용 없는 전시가 분명 있어요.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에요. 어떤 블록버스터 전시에선 제가 파리에서 200~300유로면 사는 작품이 걸려 있는 것도 본 적 있어요. 이것은 한 방을 노리는 일부 기획사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죠. 안타까운 건 이렇게 잘못된 전시를 블록버스터로 포장해서 많지 않은 한국의 미술 애호가들을 미술관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에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시 기획자들이 다양성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편식하는 아이들한테 다른 음식을 조금씩 맛보게 해줘 다양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줘야 하잖아요. 대중은 편식하게 돼 있어요. 단것, 맛있는 것만 원하죠. 이건 대중 탓이 아니에요. 기획자가 대중의 구미에 맞는 전시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죠. 저는 블록버스터도 여러 버전이 필요하다고 봐요. 한 방, 대박만 좇는 전시 말고 5만, 10만이 오는 다양한 블록버스터가 나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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