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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 축복 아닌 기회 박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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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교수

"20세기초 우리에게 '자력 근대화'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어차피 외세에 침탈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은 지극히 패배적인 역사인식일 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검증되지 않은 주장입니다."

지난해'고종시대 재평가'를 주제로 학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8일 전화인터뷰를 통해 그는 최근 논란이 된 한승조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일제시기 총독부의 '시혜론'을 그대로 옮겨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오히려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 가속화되고 성과가 나타나가 시작하자 초조감을 느낀 일제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서둘러 국권침탈에 나섰던 것 "이라며 "일제의 식민통치는 축복이 아닌 우리 민족의 자력 근대화의 기회를 박탈한 행위"라고 강조했다.

그간 이 교수를 포함한 국사학계는 한국의 근대화가 일제시대에 시작됐다는'식민지 근대화론'주장에 맞서 줄곧'내재적 발전론'을 제기해왔다.'내재적 발전론'은 조선후기 이후 자체적으로 근대화로의 길을 걸어왔다는 학설이다. 그 중 이 교수는 근대화의 주도세력으로 흔히 언급되는 개화파가 아닌 고종과 대한제국을 주목하는 입장이다.

물론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 학계에선 다양한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경제사학계에선 이 교수의 주장을 몇몇 근대화 사례를 지나치게 과장한'부조적(浮彫的) 근대화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대한제국의 개혁이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봉건적 왕권강화책이었다는 견해도 나온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학계는 물론 대중에게도 잊혀졌던 고종과 대한제국을 새롭게 각인시키고 학계에 본격적인 근대화 논쟁을 촉발시켰다는 점은 큰 성과로 꼽힌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한 교수는 우리가 일본에 병합되지 않았으면 러시아에 병합돼 공산화되는 등 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당시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반도의 식민지화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란 가정은 학술적으로 검증될 수 없고 그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그같은 역사인식의 문제점은 국제관계에서'힘센 자만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한다는데 있다. 그것은 상해 임시정부 등에서 독립의 당위성으로 국제사회에 줄곧 제기해 온 식민통치의 불법성과 국제적 평화공존론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다."

-실제로 당시 대한제국에'자력 근대화'의 힘이 있었는가.

"과거처럼 대한제국을 '무능한 정부'로만 인식하면 필연적으로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비록 근대화 과정이 일본보다 한발 늦었고 결국 일제에 의해 좌절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그런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일제시대는 결코'축복'이나 '시혜'가 아닌 '기회와 가능성의 박탈'일 뿐이다. 일반 가정에 비유하면 마치 지금은 좀 어렵지만 앞으로 잘 살아보겠다고 나선 가장을 이웃이 강제로 쫓아내고 안방을 차지한 꼴이다. 실제로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개혁으로 러일전쟁 무렵에는 산업화가 빠르게 진척되고 각종 경제지표도 상승하는 등 성과가 나타났다. 일제가 당시 불법적인 방법으로 국권침탈에 나선 것도 근대화 개혁이 가속화되고 성과가 나타나가 시작하자 초조감을 느끼고 서둘러 차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야기다.

"일제시대 이래 뇌리에 박힌'대한제국은 무능한 정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그만큼 힘들다. 일례로 사람들에게 서울에 전차가 다니기 시작한게 도쿄보다 3년 앞선다고 말하면 좀처럼 믿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이 대한제국기의 개혁을 관찰한 기록을 보면 꼭 지금의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사람들은 흔히 100년전 우리 조상들을 극히 무능한, 혹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한다.하지만 그것도 편견일 뿐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시 경제통계 등을 토대로 당시 우리 경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으나 반면 일제시대 이후 뚜렷한 발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 실증자료라는 것도 앞으로 제대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각종 경제발전 수치들은 주로 총독부가 작성한 관변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른바 '시혜론'적 관점에서 발행된 통계라는 것이다. 통계는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실제로 일제시기 당시에도 숫자 조작 논란이 제기됐지만 그간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과정은 그렇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데 해방이후 UN 관련기구에서 낸 한국경제에 대한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시대의 각종 설비나 시설이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안된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시설들이 한국 경제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일본본토와 대륙침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게 아니라 한국에 남겼던 시설이나 각종 제도가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또 어떤 폐해를 남겼는지 제대로 검증해봐야 한다 "

-앞으로의 연구계획은.

"지금까지 고종 연간의 개혁작업과 당시 각종 조약을 통해 국권침탈의 불법성을 규명하는데 노력해왔다면 앞으로는 당시의 경제상에 대한 구체적 복원을 시도할 계획이다. 연구가 진척되면 식민지근대화론과의 보다 본격적인 논쟁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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