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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② 서울 마포고 김평원 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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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이 확대되면서 학교마다 학생들의 스펙(자격조건)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 보니 교실은 실적 챙기기에 급급해져 열정과 잠재력을 일깨우는 가르침은 찾기 힘들어졌다. ‘입학사정관 전형의 뜻은 그런 게 아닌데…’ 고민하던 서울 마포고 김평원(37) 교사는 생각을 거꾸로 뒤집었다. 스펙을 학교 밖에서 찾지 말고 제자들과 직접 만들어보기로.

글=박정식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마포고 박지현(아래)·이윤상·유병헌군과 김평원 교사, 위현서·장영근(왼쪽부터)군이 복원한 변이중 화차와 행주산성 대첩 상상도를 보여주고 있다. [김경록 기자]

김 교사는 ‘프로젝트 기반 융합교육’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한 주제(가설)를 정해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연구과제와 실험을 분야별로 나눠 수행한 뒤, 결과를 서로 비교하며 통합·검증하는 수업 방식이다. 학생들이 특기를 활용해 협동하며 연구하는 점이 특징이다.

 때마침 마포고는 교육과학기술부의 과학중점학교로 선정돼 새로운 과학수업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수업의 내용과 형식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학생들이 스스로 고민하며 열쇠를 찾아가는 연구를 직접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죠.” 현행 고교 교육과정에 대해 가졌던 아쉬움도 암시가 됐다. “인문계 학생은 과학적 사고를 하지 않고, 자연계 학생은 인문학 자료를 읽거나 상상하는 힘이 부족해요. 미래사회는 통합능력을 요구하는데 문·이과로 나눠 생각을 닫아버리니….”

 김 교사는 프로젝트를 ‘전통과학’으로 정했다. 조상의 옛 기술을 재현해 보면 재미와 지식을 함께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정답이 없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도 선택의 기준이 됐다. 주제는 ‘화차’로 정했다. 옛 문헌에 행주대첩 때 쓰였다고 전해지는 화차를 복원하는 실험이다.

행주대첩에 쓰인 화차에 대해 기존 학자들이 추정해 온 장갑차 가설 모형.

그러나 주변에선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많았다. 1점이 아쉬워 하루 종일 공부만 해도 모자랄 판에 입시와 상관도 없는 실험 연구를 한다는 발상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연구하는 체험을 통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대한 확신을 체득하는 것이 시험 점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겨울방학 때 참여할 학생 30여 명이 선발됐다.

 이들에게 각각 전공계열에 맞는 연구과제를 줬다. 국어·한문을 좋아하는 학생에게는 고문 해석과 근거 발췌를, 역사·지리를 전공하고 싶은 학생에게는 행주산성과 행주대첩 연구를 담당하게 했다. 수학·물리를 잘 하는 학생은 화차·화포 기술을, 미술학도는 화차 디자인과 행주대첩 전투장면 그림을 맡았다. ‘행주대첩 때 신기전이 쓰였을까’ ‘변이중 화차는 장갑차였을까’ ‘화차는 달구지나 수레였을까, 인력거였을까’ 여러 질문을 놓고 수 차례 의견 공방을 벌였다.

 여러 모형의 화차를 만들고 모의 발사실험도 하면서 옛 문헌을 하나씩 검증했다. 행주산성을 답사해 산성 지리도 모형으로 복원했다. 그러나 연구가 한 학기 넘게 계속되면서 학생들이 그만두기 시작했다. 대입시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화차를 만들 때는 9명만 남았다.

 그는 “학생부에 실적 한 줄 더 넣으려고 자신을 입시상품으로 만들면 안 된다. 열정과 도전이 담긴 스펙을 만들어야 한다”며 제자들을 설득했다.

 연구가 무르익으면서 학생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토론 능력과 발표력이 길러지고 자신의 생각을 상대가 쉽게 이해하도록 전달하는 법도 알게 됐다. 대학별 고사의 하나인 논·구술 능력은 덤으로 얻었다. 유병헌(2년)군은 “시험을 보기 위해서만 배우던 역사학을 전문가처럼 비평하는 눈을 길렀다”고 자랑했다. 행주산성 지리 모형을 만들었던 장영근(3년)군은 “과학고 학생들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지식을 찾아 실험해 보는 도전정신을 가지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장군은 올해 대학 수시모집에서 지리학과에 지원했다.

 진로를 방황하던 학생들은 자신의 특기와 전공을 발견했다. 김재근(2년)군은 사관학교에서 기계공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화차의 발사 기술을 연구하면서 흥미를 느낀 것. 영상 촬영을 담당한 이윤상(2년)군도 다큐멘터리 PD로 진로를 정했다. 화차 모형을 설계한 위현서(2년)군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할 계획이다. 김 교사는 “입학사정관제가 학생들이 연구과정에서 실패한다 해도 열정과 도전정신을 발휘했다면 기회를 주는 제도로 정착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째 주제로 ‘수원성 건축기술’을 정하고 수업 과정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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