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개헌 준비 당장 착수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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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요즘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개헌 이야기가 부쩍 늘고 있다. 언제 개헌 논의를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올해 말이라거나 내년 말이라는 등 다양한 발언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와 안보상의 심각함이나 사회 갈등과 불안 등을 생각해 보면, 이 상황에서 정치권이 개헌 문제를 놓고 싸움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개헌의 필요성이 있다면 반드시 지금 이에 관한 준비에 착수하는 것이 개헌의 정략적 이용을 방지하는 데도 필요하다.

시기부터 말하자면 개헌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는 미루더라도 전문가들의 조사.연구와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적 기구 설치는 지금 당장 해야 한다.

1948년에 처음 헌법을 제정할 때도 건국의 급박함과 인적.지적 자원의 미비로 그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다. 국민적 합의도 제대로 도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헌법 내용도 불분명한 것이 적지 않았다. 그 이후의 개헌도 충분한 사전준비 없이 권력자들의 의도대로 행해졌다. 개헌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연구는 전두환 정부가 출범할 때인 80년의 헌법 개정을 앞두고 유사 이래 처음 행해졌다. 헌법연구반을 구성해 여러 나라를 방문, 조사.연구한 게 그것이다. 그 외에 개헌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연구활동은 없었다.

헌법 개정의 방법과 절차에서는 먼저 미래 한국의 청사진부터 그리고 이에 합당한 헌법을 디자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에서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바람을 잡을 게 아니라 전문가들에 의한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그 다음에 어느 범위에서 개헌 논의를 할 것인지를 정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이해하기 쉽도록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공론화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부터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에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헌법조사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인적.물적 시스템을 구축해 2년 정도 조사와 연구를 하는 게 필요하다. 개헌 논의가 정략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 방법과 절차에서 투명성과 중립성이 보장돼야 함은 물론이다.

개헌 내용은 반드시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담아내는 그랜드디자인과 합치해야 한다. 현행 헌법을 보건대 권력구조에서는 시스템상 부정합적인 것이 많고, 기본권 보장 체계에서도 부적절한 게 적지 않다. 국내의 연구 수준을 볼 때 대통령제냐, 내각책임제냐, 이원정부제냐 또는 다른 변형된 정부 형태냐 하는 정부 형태에 대해서도 더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4년 중임의 대통령제로의 개헌도 자주 거론되고 있으나 대통령제는 본질적으로 승자독식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과 힘에 의존하는 정치 풍토를 해소하는 데 답이 될지는 숙고를 요한다. 대통령제를 취할 때도 대통령 선출방법, 임기, 국무총리제 폐지, 부통령제 도입, 대통령 특권의 축소.폐지, 대통령권한대행제도와 승계제도의 정비, 행정부의 법률안 제출권 폐지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를 채택하는 경우에도 성공.실패 사례 연구, 우리에게 적합한 모델 개발이 필요하다. 예산 법률화, 감사원 폐지, 국회의원 특권 제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 헌법소원의 정상화, 선거재판과 탄핵제도 정비, 배심제와 참심제 도입, 경제조항 정비 등 많은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

21세기 한국에 합당한 개헌을 함에 있어 개헌 논의가 2007년의 대선에 영향에 준다면 차차기 정부부터 적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요즘 개헌에 관한 언급들은 개헌 논의의 시기.방법.과정.내용 등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너무 피상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함께 지적해 둔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