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전환을” 사내하청 근로자 “제조업체 공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비정규직(사내협력업체 근로자)를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노동계)

 ‘글로벌 스텐다드를 인정해달라. 국내 제조업체가 모두 쓰러지면 정규직 쟁취가 무슨 소용이냐.’(업계)

 대법원의 판결 하나를 놓고 울산지역 대규모 제조업체 노사가 벌집 쑤신 듯 뒤숭숭하다.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협력업체 근로자 최모씨를 원청업체(현대차) 정규직으로 봐야한다’는 판결이다.

 사내협력업체란 원청업체 안에 있는 하청업체다. 소속 근로자의 신분은 사내협력업체 정규직이다.하지만 원청업체 소속의 정규직에 비해 고용이 불안하고 봉급과 복리후생도 열악하다. 그래서 노동계는 이들을 원청업체 정규직과 대비해 비정규직으로 분류한다.

 현대차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소속된 금속노조는 최씨에 대한 판결이 비정규직 모두에게 해당된다며 2000여명 규모의 집단소송을 준비중이다. 다음주부터는 시위 등 실력행사에 나설 예정이다.

 대법 판결의 영향은 현대차뿐 아니라 자동차·조선·철강·화학·전기전자 등 국내 대규모 제조업체 거의 모두에 미칠 전망이다. 모두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은 업체에 따라 정규직 근로자 수의 10%선부터 1.2배까지 다양하다. 현대중공업과 미포조선의 사내하청지회도 조선업계의 하청 철폐를 추진하기 위한 조직화 작업에 들어갔다.

 ◆아전인수=대법원은 7월22일 현대차 사내하청업체에서 근무하다 2005년 2월 해고된 해고근로자 최씨가 중앙노동위원장을 상대로 낸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구제 재심판정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판결의 핵심은 “최씨는 5가지 사실(①컨베이어벨트에서 ②정규직과 섞여서 ③원청업체의 지시와 통제를 받아 등)로 미뤄 ‘현대차로부터 작업 지휘를 받는’ 파견근로자로 인정된다. 파견 근로자는 2년이 지난 시점(최씨의 경우 2004년3월)부터 원청업체 정규직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최씨가 파견근로자인지는 서울고법의 재심리 결과를 봐야 안다. 설사 최씨를 정규직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이는 최씨 개인에 한정된 것이다. 비정규직 모두에게 해당되는 양 호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금속노조는 ‘대법원 판결 궁금증 해설’이라는 자료를 통해 “5가지 가운데 일부만 충족돼도 해당된다. 2년이 안 된 비정규직도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한다. 그 동안 정규직과 차이가 난 임금 등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장=현대차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개개인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받아봐야 가부가 확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씨 역시 서울고법의 재심리, 대법의 최종확정 판결을 받아봐야 지위가 확정된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반면 금속노조의 희망대로 될 경우 현대차는 울산·전주·아산공장에 있는 비정규직 7000여명을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 노동계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로 인해 현대차는 연간 4000억원 가량의 임금부담이 늘어난다. 체불임금(근속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정규직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차이만큼 임금을 체불했다는 주장)도 1조원이 넘을 전망이다.

 현대차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고용의 경직성이다. 국제시장 상황에 따라 근로자 수를 유연하게 조절해야 경쟁력이 생기는데 한국은 스스로 기업의 손발을 묶어놓는 격이라는 것이다. 현대차는 구조조정이 필요할 경우 비정규직을 우선 내보내는 방법으로 대응해왔으나 모두 정규직이 되면 그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사내협력업체 근로자를 파견근로자로 인정하고 나면 더 이상 이들을 고용할 수 없다. 파견근로자법에는 ‘제조업체가 파견 근로자를 사용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다. 비정규직 사용 자체를 불법화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2004년3월 근로자 파견법을 개정, 도요타 등 제조부문에 인재파견업체 근로자의 사용을 허용했다. 독일의 폴크스바겐도 노조와의 타협에 따라 기간제(본사 직원의 일부)와 파견 근로자 등 비정규직을 활용, 고용유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울산지역 한 변호사는 “정치권이 나서서 법과 현실을 조화시켜내지 못하면 한국경제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기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