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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봉 기자의 도심 트레킹 ⑬ 서울 역사문화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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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짧은 코스만 소개해 왔던 ‘도심 트레킹’이 이번 회부터 5㎞ 이상의 긴 코스를 소개합니다. 1~2㎞의 코스로는 참된 트레킹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서울 시내의 숨어 있는 숲길, 그 동네에 50년을 살아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길, 역사와 문화가 있는 길, 맛집이 모여 있는 길을 도보여행 전문가 윤문기씨와 걷습니다. 모든 코스는 지하철역에서 시작해 지하철역에서 끝납니다. 또 코스마다 중간에 마을버스를 타는 곳을 거치도록 했습니다. 공들여 찾아낸 서울의 보석 같은 길입니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옛 러시아 공사관 주변길 새단장

경희궁 둘레길을 돌아 내려가는 길. 궁내 기와지붕이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에는 빌딩숲이 내다 보인다. 서울의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길이다. [김상선 기자]

서울 중구 일대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가 응축된 곳이다. 덕수궁·경복궁·경희궁이 모여 있고, 홍난파 가옥, 딜쿠샤 등 근대의 흔적도 오롯하다. 인왕산에서 굽어보는 빌딩숲 서울의 경치는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북촌만은 못하지만 근대화의 상처가 보이는 서민적인 서촌의 한옥들도 나타난다. 도시에 영혼이 있다면 서울의 혼은 이 길 어디쯤에 깃들 만하다.

 지난 회 소개했던 정동길 구 러시아 공사관 뒤편에서 다시 걸음을 옮긴다. 구 러시아 공사관은 예원학교 옆 골목을 오르면 정동공원 위쪽에 보이는 하얀 건물이다. 지난달쯤 이 뒤편에 작은 길이 뚫렸다. 구 러시아 공사관과 대로는 계단으로 이어지고, 서울역사박물관 살구색 건물이 길 건너 보인다. 계단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LG 광화문 빌딩 앞을 지난다. 역사박물관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옛날 전차를 본다. ‘을지로’를 향해 달렸던 이 전차는 박물관 앞에 멈춰 서서 가끔씩 사람들을 태운다. 타본 적 있는 어른들은 추억에 젖고, 나무틀로 된 창문과 문·바닥을 보며 어린이들은 신기해 한다. 월요일은 문을 열지 않고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탈 수 있다.

 박물관 앞에서 주차장 방향으로 걷는다. 오르막인데 출퇴근 때를 제외하고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주차장을 뜻하는 ‘P’자 푯말에 ‘경희궁’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있다. 이쪽으로 틀어 박물관 뒤편의 주차장을 가로지른다. 주차장 끝 경희궁으로 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몇 발자국 오르자 경희궁 숭정문 지붕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돌계단을 다 오르니 경희궁 숭정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차장의 차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등장한 우람한 대문은 경이로웠다.

 경희궁 외곽 산책로를 걷는다. 경희궁 숭정문 쪽으로 가지 말고 돌계단을 다 오른 뒤 바로 오른쪽 흙길을 밟는다. 조금씩 길은 위로 솟고 언덕바지에 오르면 경희궁의 안쪽이 들여다보인다. 조선 시대라면 궁을 위에서 바라보는 일이란 있을 수 없을 터. 숲처럼 솟아오른 기와 지붕을 굽어보니 마음이 제법 꽉 찬다.

 경희궁은 복원된 지 8년 정도, 영화를 누리던 옛적의 반도 못 미치는 정도만 복원됐다. 산책로를 따라 길을 다 올라가면 휑한 공터가 하나 나온다. 공터 뒤편에 비밀스러운 오솔길이 하나 있다. 야트막한 산길이다. 돌담을 따라 경희궁을 내려다보는 둘레길도 좋지만, 산길도 아름답다. 역사박물관 큰길이 코앞인데 바로 숲길이 있다는 사실이 자못 놀랍다. 이 길을 오르다 보면 옛 송월동 기상청 건물 뒷문이 나온다. 여기를 거쳐 길을 다 내려가면 다시 경희궁 둘레 산책로와 만난다.

경희궁 정문 옆에는 숨은 맛 골목이 …

둘레를 다 걷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으로 빠져나온다. 아직 이 옛 건물의 앞뜰에는 참새들이 수십 마리 뛰놀고 있었다. 큰길로 나가지 말고, 내일신문사 직전 뒤편 골목으로 접어든다. 숨겨진 먹자골목이다. 성인 남자 어깨 두 명이 맞닿을 만한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맛집들이 붐빈다. 오래된 맛 골목인데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골목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강북삼성병원 쪽으로 빠져나간다는 생각으로 걷다 보면 병원 옆길과 만난다. 이 골목에는 한식집 ‘미조’, 양식집 ‘Bis’, 콩탕 전문인 ‘빨간콩 하얀콩’ 등 대부분 보통 맛 이상은 하는 집들이다. 큰길로 빠져나오면. 오른쪽으로 틀어 걷는다. 잘 정돈된 보도를 따라 교육청 정문을 지난다.

 생명의 말씀사가 보이면 오른쪽에 ‘홍난파 가옥’ 팻말이 붙어 있다. 두 갈래길 중 평탄한 길을 피하고 오르막을 오른다. 서울 성곽길이 시작된다. 돌계단을 오르면 왼편이 내려다보인다. 사람 사는 동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정겹다. 길의 끝에는 홍난파 가옥이 있다. 후손들이 운영하기 때문에 평일에만 문을 연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홍난파 선생의 손녀인 홍난표 여사의 피아노 반주를 들을 수 있다.

 홍난파 가옥을 나와 길을 걷다 보면 뒤편 딱 버티고 선 인왕산이 보인다. 길을 따라 걷고, 삼거리가 나와도 좁은 골목 안으로 계속 직진이다. 오르막을 조금 오르다 보면 왼쪽에 낡은 붉은 벽돌 건물이 서 있다. 1923년 지은 건물로 ‘딜쿠샤(힌두어로 이상향)’라고 한다. UPI통신의 앨버트 테일러 특파원이 세계 최초로 우리 3·1운동을 해외로 타전한 곳이다. 현재 사유지로 내부 관람은 안 된다. 그 맞은편에는 420년 묵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권율 장군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이곳이 바로 그의 집터다. 은행나무 뒤편 활짝 열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샛길이 나오고 주민들이 만든 텃밭이 보인다. 왼쪽으로 오르막을 오른다. 오른쪽에 작은 수퍼마켓 ‘옥경이 식품’이 나온다. 인왕산에서 시작해 서촌한옥마을을 걷는 길은 다음 회에 이어진다. 수퍼 앞에서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으로 가는 ‘종로05’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위성 지도 등 자세한 코스 정보는 ‘mywalking.co.kr(발견이의 도보여행)’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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