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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를 신고 춤춰라, 발레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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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박성찬 다날 대표(왼쪽)와 발레리나 박세은씨.

발끝으로 춤추는 발레리나에게 발레 전용 신발 ‘토슈즈’는 몸의 일부다. 광목이나 마 같은 천을 여러 겹 덧대 만드는 이 신발로 발을 지탱하면서 발레리나는 무대 위에서 몸의 예술을 펼친다. 한 켤레에 10만~20만원씩 하는 것이 금세 닳아 자주 갈아 신어야 한다. 한 벤처업체 대표가 지난 4월 발레리나 박세은(21)씨의 토슈즈 후원자로 나선 건 이 때문이다. 콩쿠르를 앞둔 세은씨가 하루에 한 켤레의 토슈즈가 해질 정도로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서다.

 “인재가 가장 큰 자산인 정보기술(IT) 분야야말로 문화·예술을 통해 감성과 아이디어를 키워야 합니다. IT에 예술적 감동이 스며들어 창조적인 기술이 나올 수 있어요.”

 세계 처음으로 휴대전화 결제 서비스를 선보인 다날 박성찬(47) 대표의 이야기다. 최근 미국 최대 통신업체 버라이즌이 이 회사의 휴대전화 결제 서비스를 도입했다. 매출 839억원의 다날은 대만·중국에 이어 북미까지 진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지난 8월 ‘2010 서울국제 발레 페스티벌’에서 ‘돈키호테’의 주인공 키트리역으로 열연하는 박세은씨. 그녀의 연기는 넘치는 에너지와 뛰어난 테크닉으로 호평을 받았다. [사진=석정훈 감독 블로그]

 세은씨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중 세 대회를 석권해 ‘발레의 김연아’로 불린다. 2006년USA잭슨발레콩쿠르 우승(금메달 없는 은메달)에 이어 2007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 그랑프리, 지난 7월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 시니어 부문 금상을 차지했다. 토슈즈 지원을 계기로 세은씨와 인연을 맺은 박 대표는 불가리아 대회 왕복 여객기 요금과 대회 의상비 등 지원을 계속했다. 신진 문화예술인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IT와 예술의 만남도 시도하고 있다. 발레 문외한이던 박 대표는 이 일을 계기로 새로운 예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26년 세대 차를 넘어 돈독한 우정을 쌓아가는 두 사람을 최근 경기도 분당 박 대표의 사무실에서 함께 만났다. 사장 집무실은 임직원의 도서실을 겸했다. 세 벽면 서가는 소설·교양·경제경영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과 정기간행물 등으로 빼곡했다.

 기술과 문화예술적 가치의 융합은 근래 최고경영자(CEO)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지는 화두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뤄가는 이 두 사람이 창조적 에너지를 어디서 얻는지 들어봤다.

몰입 박세은  한 가지에 몰두하면 에너지가 생겨요. 춤 외에 다른 건 생각하지 않지요. 1등 하겠다거나 경쟁자를 물리치겠다는 마음은 먹지 않아요. 이번 바르나 콩쿠르에서도 그랬더니 출전 자체를 즐길 여유가 생기더군요. 긴장도 덜 되고 춤에만 몰입해서 내 동작을 즐기게 되죠.

박성찬 뭔가에 몰입해서 행복과 성취감을 느껴본 사람은 압니다. 한계가 없다는 것을. 한계를 넘어서면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세은 이번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제 한계를 다시 한번 넘어선 것 같아요.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돈키호테’ 공연 연습을 마치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정도로 진이 빠지죠. 하지만 그때부터 자정까지 쉬지 않고 콩쿠르 연습을 했어요. 그런데 놀랄 정도로 힘이 솟는 거예요. 그때 길러진 근력이 시설이 열악한 콩쿠르 대회장에 빨리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자신감 성찬 스스로를 믿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는 힘을 줍니다. 남들의 기준이 내 기준이 돼선 안 돼요. 휴대전화 결제 서비스나 휴대전화 벨소리 서비스를 처음 세상에 내놨을 때 비웃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자신감을 갖고 통신업계 사람들을 설득했죠. 하도 집요해 ‘스토커’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미국 시장 진출도 자신감이 없었으면 못 해냈어요. 4년 동안 300억원 넘게 쏟아부으면서 은근히 걱정했지만 결국 해냈어요.

세은 실패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키호테’ 공연에서 다들 1회전만 하는데 전 3회전을 고집했어요. 주위에선 자꾸 실수하면서 왜 무리하게 도전하느냐고 말렸죠. 실패를 벗 삼아야 진짜 하고 싶은 기술을 해낼 수 있어요.

성찬  비밀이 하나 있는데, 전 수시로 거울 속의 나와 이야기를 합니다. 학창 시절의 전 꽤 무서운 인상이었거든요. 그래서 웃는 연습을 한답시고 시작한 습관인데, 이제는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나눠요. 잘못한 일이 있으면 내 얼굴에 욕도 하고 잘하면 칭찬해 주지요.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술잔 들고 건배도 해요.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켜나가는 방법이기도 해요.

세은  비교적 늦게 발레를 시작한 편이에요. 아버지랑 발레 공연을 보러 갔다가 멋져 보여 시작한 것이 열 살 때였어요. 배우는 속도가 느리다고 유급된 적도 있었고요. 해외 유학은 꿈도 꾸지 못했어요. 하지만 발레가 좋았어요. 대선배들의 공연을 모방해서 내 것으로 소화한 뒤 그보다 조금 더 나을 수 없을까 애쓰다 보니 저만의 발레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수성  성찬  세은씨가 새로운 발레로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려면 세상의 변화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죠. 새로 나오는 IT 기기를 적극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세은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기에 관심이 많아요.

성찬 아이패드·갤럭시탭 같은 태블릿PC가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봅니다. 종이 없는 사무실이 앞당겨질지 몰라요. 국내에 아이패드가 본격 상륙하는 대로 회사 전 임직원에게 한 대씩 지급하려고 해요. 태블릿PC는 문화·예술을 소비하는 행태에까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세은씨한테도 하나 선물해야겠네요.(웃음)

분당=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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