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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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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음악의 여신 뮤즈가 이 가을엔 여기서 쉬어가길 작정이라도 한 걸까. 9월부터 노래 때문에 울고 웃는 일이 쏟아졌다. ‘남자의 자격’이 클래시컬한 하모니로 잔잔히 노래 바람을 불러 일으키더니, ‘놀러와’에서는 송창식과 1970년대 가수들이 잃어버렸던 추억을 뒤흔들어 놓았고, 아마추어들의 경연 ‘슈퍼스타 K’가 사람들의 마음을 콩닥콩닥 거리게 만들면서 가을 노래 바람의 대미를 장식할 모양이다.

 사실 ‘슈퍼스타K’는 ‘아메리칸 아이돌’의 광팬인 나로서는 시큰둥했던 프로다. ‘아메리칸 아이돌’은 나에게는 TV쇼의 완전체이며, 지상 최대의 쇼다. 원조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류작을 무시하는 것이 원조의 권위에 바칠 수 있는 애정 표현이라 믿는 고집이 있기 마련이다. 가끔씩 보긴 했지만 노래도 듣기 전에 투표부터 하는 이상한 진행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장재인과 김지수가 통기타를 들고 댄스곡 ‘신데렐라’를 바꿔 부르는 순간 그냥 두 손 들고 말았다. 그 미국 쇼에서 가장 좋아했던 부분도 이렇게 옛 노래가 젊은이들을 통해 재발견되고 그러면서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재능이, 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지 않나. 이 정도면 아류작이든 짝퉁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처음으로 한 짓은 좀 더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외워 섬기던 송창식의 쇼를 돈을 내고 다시 보기를 했고, ‘남자의 자격’을 보고 나선 고등학교 때 합창반 반주를 했던 마스카니의 노래를 몇십년 만에 피아노로 쳐보기도 했다. 나만 설레진 않았을 거다. 노래란 것이, 음악이란 것이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고, 노래와 엮인 추억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다들 이번에 한번쯤 노래 때문에 몸에 소름이 돋고 마음이 설레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음악 과잉인 시대에 이들의 노래가 이렇게 가슴에 와 닿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진짜 목소리와 기타와 피아노, 그리고 조심스럽게 꾸민 화음만으로 만들어낸 노래의 순수함이 첫 번째일 것이다. 들이대듯 요란한 전자음과 어지러운 댄스, 강요하는 똑같은 멜로디와 리듬의 반복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겁고 아름답다는, 잊고 있던 노래의 본질을 새삼 깨닫게 해줬다.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들에게서 무언가 속에 가득 채워진 것이 넘쳐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슈퍼스타의 아마추어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무대를 향한 꿈이, 송창식에게서는 오랜 시간 도 닦듯 자신을 세공해 온 수련의 깊이가, ‘남격’의 합창단에게서는 지휘자와 단원들이 화음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이는 조화의 노력이 흘러 넘쳤다. ‘남격’의 할머니 합창단에게서는 노래를 향한 겸허한 존경이 또 흘러 넘쳐 감동을 주었다.

 물론 노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예술은 속에 꼭꼭 채워 쌓아 올려 더 이상 갈 곳 없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넘쳐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다. 가을이 지나더라도 그렇게 아름답게 차서 흘러 넘치는 노래들을 계속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