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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늪 가는 길 … 창녕의 청년들이 신지식 깨우친 배움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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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호 19면

가을색이 들기 시작한 창녕군 대지면 석리의 아석 고택 연못, 반도지(半島池). 100년 이상 된 노송과 목백일홍, 사랑채 지붕의 그림자가 수면에 어우러져 있다. 사랑채 인근 별당 누마루에선 각종 학회가 열린다. 신동연 기자

1억4000만 년 신비를 지닌 생태 보고, 우포늪 가는 길.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 324번지 앞길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세월의 빛을 다르게 담은 고택 지붕의 기와들이 물결치듯 한눈에 들어온다. 창녕군이 조성한 주차장 한편에는 황갈색의 양파 시배지(始培地) 조각상이 생뚱맞은 생동감으로 방문객들을 맞는다. 고택 앞으로 펼쳐진 ‘어물리 뜰’ 은 누릇한 10월의 색깔로 물들었고 뜰 끝 화왕산(756m)의 높고 긴 자락은 하늘과 맞닿았다. 창녕 성(成)씨 아석(我石) 고택. 후손의 노력으로 13년 전부터 단장하기 시작한 고택은 그윽함과 넉넉함으로 현대인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기에 딱 맞는 공간이다. 하지만 고택은 말 그대로 풍상을 겪었다.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6·25전쟁의 상처, 계몽주의의 열정을 지닌 고택 주인들의 치열한 삶이 이곳에 담겼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47> 창녕 성(成)씨 아석(我石) 고택

구한말부터 일제까지의 건축양식
지난 9일 한국안보문제연구소(이사장 김희상) 한옥 체험단에 묻어 아석 고택을 찾았다. 솟을대문과 안대문을 지나자 연못 정원과 사랑채(龜蓮亭), 별당, 병천정사(<74F6>泉精舍)가 한꺼번에 안기듯 다가온다. 수면을 향해 곡선으로 드러누운 노송을 품고 있는 연못 반도지(半島池)는 한 폭의 그림이다. 반도지는 연못의 모양이 한반도 모양이라 100년 전부터 불렸다고 한다. 목백일홍과 향나무·소나무 등 각종 수목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수면 위에서 춤을 춘다. 연못 왼쪽 약간 높은 곳에 자리한 별채의 누마루에선 한국 고대사학회 회원들의 세미나가 한창이다. 연못엔 인공 배수로가 없다. 비가 많이 오면 수심이 4m까지 오른다. “물이 차면 차는 대로 빠지면 빠진 대로 운치가 있다.” 집 주인인 영원무역 성기학(63·사진) 회장의 얘기다.

쪽문을 지나 마주치는 한옥이 아석헌(我石軒)이다. 이곳에 자리한 서른 채 고택의 원택(元宅)인 셈이다. 성 회장의 고조부인 아석 성규호(成圭鎬) 선생이 1855년 노모를 모시고 와 터를 닦고 지은 집이라고 한다. 분가한 아석의 자손들이 집을 잇대 지으면서 4개 동 30채 규모의 한옥촌이 생긴 것이다. 아석헌에 이어 석운재(石雲齋)가 1860년대, 경근당(慶勤堂)은 1920년대, 일신당(日新堂)이 1930년대에 지어졌다. 만 세 살부터 10살까지 경근당 뒤 본채에서 살았던 성 회장은 매일 아침 경근당 마루를 닦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아석 고택들은 지어진 시기에 따라 각각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전국의 유명한 고택들이 시간을 붙잡은 채 그 시대만 얘기하고 있는 것과 다른 모습이다. 고택에 얽힌 사연도 많다. 석운재는 1863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자 아석 선생이 관산서원의 안채를 그대로 옮겨다 지었다고 한다. 성 회장은 석운재 정원에 허물어진 고택에서 나온 주춧돌을 둥글게 돌려 세웠다. 영국 스톤 헤지를 연상시키는 이곳은 담소 장소로 그만이다.

비교적 늦게 지어진 경근당 안채 마루는 사방에 유리문을 달았고 실내 목욕탕까지 갖췄다. 당시 서양 건축의 편리함을 마다 않고 도입한 것이다. 집과 집을 나누는 담장도 전통 담장과 달리 낮았는데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집안 어른들이 꾸민 것이라 했다.
성 회장의 조부모가 기거하며 과객을 맞았다는 일신당 마루는 유리로 4면이 장식됐다.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는 계몽 지주로 통하던 아석의 문중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 회장의 5촌 당숙인 성유경(1982년 사망)의 월북이다. 남로당 활동을 하다 6·25 직전인 48년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는데 그 딸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이자 김정남의 모친인 성혜림(200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이다. 한때 성혜림의 생가란 소문이 나면서 아석 고택이 주목받기도 했는데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성혜림의 생모 김원주(94년 사망)가 둘째 부인으로 집안의 허락을 얻지 못해 성혜림이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찾아오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아석 고택은 6·25전쟁 때 미군 24사단 본부 지휘부로 쓰였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할 때 서류를 태우고 가면서 절반 정도가 불에 탔다고 한다. 일신당 마루 기둥엔 손도끼 투척 연습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성 회장은 “정황상 미군이 떠난 이후 집에 들어온 인민군들이 그랬지 않나 추정한다”고 했다.

아석 고택의 상흔은 적선지가(積善之家, 좋은 일을 많이 함)의 정신을 대대로 실천해온 집 주인들의 칭송으로 치유된 듯하다. 1863년 병자년 흉년 때 아석 선생은 땅을 팔아 굶주린 인근 빈농의 구휼에 나섰다. 일본 법정대 경제학부를 나온 성기학 회장의 부친 우석(愚石) 성재경(成在慶·1916~81) 선생은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다 1·4후퇴 때 낙향, 주민 교육과 농가 소득을 올리는 데 힘썼다. 성 회장은 “당시 농민들이 너무 가난했고 보리 농사를 하고 있었다”며 “선친이 환금 작물인 양파 신농법을 교육하고 선진 유통 체계를 도입해 인근 농민들의 삶이 윤택해졌다”고 했다. 창녕이 양파 주산지가 된 배경이다. 성재경 선생은 출판사를 하기 전 소작인들에게 전답을 모두 나눠줬다. 낙향 뒤 일신당에 머물며 일본 원예책을 보고 온실농법을 시작, 농민들과 함께했다. 일신당 마루 유리를 온상으로 썼다고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양파망도 성재경 선생이 고안했다. 성재경 선생은 1963년 지인들과 한국 최초의 농민 자조 단체인 경화회(耕和會)를 만들었다. 81년 작고하기 전 자신이 운영하던 협성농산 주식을 경화회 조합원 수백 명에게 다 분배했다. 대조면 입구엔 47년 전 지어진 경화회 건물이 지금도 회원들의 활동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아석 고택은 98년 성기학 회장의 의지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편찮으신 어머니가 창녕 옛집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내려왔는데, 놔두면 무너지기 직전 상태였죠. 아석헌·경근당·일신당 같은 집은 보강만 했고, 불타 없어진 집은 전국 각지에서 해체되기 직전 집을 사들여 고재를 추스린 뒤 가져와 복원했습니다.” 완벽하게 복원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모든 게 그렇더라고요. 목표를 확실하게 하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시작해서 일을 하다 보면 스스로 진화하는 거죠. 4~5년 전 복원한 한옥이 작은 세미나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집안에 흘러 내려오던 교육 정신을 우리 세대에서 다시 복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석은 최초 농민자조단체 경화회 설립
성 회장의 조부 성낙안 선생은 ‘지양강습소’를 차려놓고 일제가 폐쇄할 때까지 지역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보급했다. 선친은 6·25 때 집안에 중학교를 세워, 고장 학생들을 가르쳤다.

성 회장은 한옥 복원이 어느 정도 된 다음부터는 아석 고택을 각종 학회의 세미나 장소로 열어줬다. 환경과 역사 관련 세미나가 해마다 수개월에 한 번씩 열린다. 대관료는 무료다. 식사 지원까지 할 때도 있다. 올 초엔 아예 정기 강좌를 개설했다. 주역과 논어, 사진, 서예를 월·화·수·목요일 전문 강사가 나와 강의한다. 군민들이 대상인데, 수강료는 물론이고 교재까지 무료다. 아석 고택이 현대의 배움터로 부활한 셈이다.

“이 집이 질서 있게 잘 지어진 집은 아닙니다. 서울이나 도회지의 관료들이 살았던 고택이 아닌 시골 부농 지주의 집이거든요. 그 모습 그대로 보일 생각이고 한옥을 짓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델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고택의 방에는 에어컨이나 화장실·샤워실 등을 설치해 우리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유적으로서의 한옥이 아닌 현대 삶 속에서 한옥의 자취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죠.”

아석 고택은 어찌 보면 보물 창고 같다. 울산 먹감 머릿장(欌), 마산장, 남원 이층장, 통영장 등 경남지역 전통장이 방방이 하나씩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성 회장이 수집한 것들이다. 또 아석헌 앞 창고로 쓰이던 곳은 작은 박물관이 됐다. 가야 토기, 짚신 짤 때 쓰던 신꼴, 설피(눈신발) 등이 소박하게 전시돼 있다. 아석헌 현판 등 고택 곳곳에 조선 후기 문신으로 서화에 뛰어났던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1853~1939년) 선생의 작품이 걸려 있다. 석촌은 일제가 내린 작위를 거부하고 초야에 묻힌 인사로 유명하다. 일신당 마루엔 당을 지을 때 담원(<859D>園) 정인보(鄭寅普)가 쓴 일신당기(日新堂記) 등 귀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성 회장의 어릴 적 친구인 노중석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 회장은 “어릴 때 함께 놀면서 과객이 써놓고 간 서화집을 찢어다 딱지치기를 해 많이 없앴다”며 아쉬워했다.

“앞으로 다섯 채 정도 더 지을 계획인데 국제회의를 유치할 수 있는 한옥 콘퍼런스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형님(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얘기해 봐야죠. 재단법인을 만들어 한옥을 관리하면서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일도 했으면 좋겠고요.”
성 회장은 “한옥의 독특한 매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라며 “이곳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은 방이 그렇게 많아도 한 방에 빼곡히 모여 자면서 새벽까지 얘기꽃을 피우는 것을 종종 본다”고 했다.

일신당은 아석 고택 나머지 집들에서 500m 정도 마을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체험 일정의 끝 순서, 일신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창녕군 대지면 석리의 따뜻한 마음을 만났다. 논에서 볏짚을 거두던 10대 학생 둘(형제로 보였다)이 지나가는 외지인들에게 “안녕하세요”라며 깍듯이 인사한다. 아이를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가던 30대 아저씨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편안하고 환한 표정이다. 아석 고택은 10㎞ 떨어진 우포늪과 삼국시대 교동 고분군을 함께 보며 지친 도시 생활의 위안을 찾기에 그만인 곳이다. 하지만 복원 공사가 계속되고 있어 강좌 시간이나 학회 세미나 시간을 빼곤 닫아 놓는다. 강좌 업무를 담당하는 이기웅(010-2788-3922)씨와 사전에 연락한 다음 방문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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