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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미화원이냐고요? 서울의 추억 모으는 중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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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울역사박물관 근현대생활유산수집팀 직원들이 14일 철거를 앞둔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서울역사박물관 근현대생활유산수집팀 직원들이 14일 철거를 앞둔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에서 한 가게의 아크릴 간판을 조심스레 떼내고 있다. 김태성 기자

14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색색의 파라솔 우산 아래에서 햇사과·채소·건어물 등 식재료를 파는 상인과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고추집에서 풍겨나오는, 햇볕에 바짝 마른 빨간 고추의 알싸한 냄새와 기름집에서 나오는 고소한 냄새가 재래시장을 메운다. 그러나 옆 골목은 썰렁하다. 한복가게·옷가게 등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남·북가좌동 일대에서 2005년 시작된 가재울뉴타운 공사 때문이다.

 이 어두컴컴한 시장 골목을 기웃거리는 사람 3명이 있다. 셔터가 내려진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손뜨개 실 이야기’라 적힌 아크릴 간판을 조심스레 떼낸다. 작업을 지켜보던 인근 가게 상인들이 한마디씩 한다. “아니, 먼지 쌓인 쓰레기가 뭐가 좋다고….”

 이들은 서울역사박물관 근현대생활유산수집팀이다. 올해부터 서울 시내 재개발 지역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추억’을 모으고 있다. 낡고, 때묻었지만 서울의 근현대 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물품이 수집대상이다. 수집팀은 이 추억들을 모아 박물관에서 전시할 계획이다.

 첫 공략지는 청진동 피맛골 일대였다. 올해 1월 청진지구 재개발로 오래된 가게들이 문을 닫고 이전하자, 폐기처분할 낡은 집기를 모으기 위해 팀을 꾸렸다.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던 빈대떡집 ‘청일집’의 옛 물건을 고스란히 모아 박물관에서 전시했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던 명동 중앙시네마(옛 중앙극장)가 폐관하자 필름, 영사 일지 등을 가져왔다. 철거 중인 요정 오진암의 현판도 떼오고, 빈대떡집 ‘장원집(청진동)’의 주인 아줌마 작업복인 기름때 묻은 모시적삼도 수집했다. 인류학 박사인 오문선 근현대생활유산수집팀장은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을 잔뜩 긁어 모으기 때문에 사람들이 ‘쓰레기 청소부냐’고 묻는 일이 많다”며 웃었다.

 요즘 작업장은 모래내시장이다. 60년대 사천(沙泉) 옆에 형성돼 시작한 시장은 한때 서울 서부지역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80년대부터 재개발 이야기가 나왔고, 현재 가재울뉴타운 지구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철거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인근 지구에 비해 사업 진행은 더디다. 오 팀장은 “재개발된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온 덕에 시장이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훌륭한 수집처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짜로 물건을 수집하기 위해 팀원들은 열심히 발품을 판다. 일주일에 3~4번 모래내시장에 들러 상인들과 눈도장을 찍는다.

 “역사박물관에서 왔어요. 어르신 가게 옮기실 때 버리는 물건 모아놨다 전시한다고 지난 번에 말씀드렸죠?”(오 팀장)

 “어, 좋은 일이야.”(40년 된 골덴양복점 이강현 사장)

 “어르신, 쓰시는 물건 중에 못 써 버릴 게 있으면 좀 주세요.”

 “다 내버렸지. 못 쓰는 걸 왜 가지고 있어.”

 “아유 아까워라. 나중에 문 닫을 때 못 쓰는 가위·재봉틀 같은 거 저희한테 꼭 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못 말린다니까. 알았어, 이제 그만 와.”

 34년 된 백마기름집도 성지순례하듯 꼭 들른다. 가게 나이만큼 오래된 기름 짜는 기계 때문이다. 숙녀복 전문점 한성상회에 걸린 옷도 수집대상이다. 수집팀의 오애정 연구원은 “나중에 옷가게도 고스란히 옮겨 와 전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상인들의 ‘옛 이야기’도 모으고 있다. 수십 년을 시장과 함께한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기록해 수집품과 함께 전시하기 위해서다. 일산에서 돈 벌러 시장에 왔다가 40년을 옷가게에서 일한 김영길(59) 사장의 이야기도, 36년 전에 40만원을 주고 산 일제 재봉틀을 간직하고 있는 오바로크집 사장 이야기도 이날 수집팀의 수첩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근현대생활유산수집팀의 수집 분야는 넓어지고 있다. 70년대에 결혼한 부부의 연애편지, 60~70년대 유행하던 옷, 2010년 남아프리카 월드컵의 응원 도구, 대북 전단 등 23개 분야에 달한다. “지금 서울을 만든 평범한 이의 생활품이 곧 서울의 역사인 만큼 이 물건을 잘 정리해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어요.” 수집팀은 지금도 서울 구석구석을 돌며 추억을 모으느라 바쁘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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