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영희 칼럼

남북한, 다시 말을 틀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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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북한의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의 먼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의 판박이 같은 외모를 타고났다. 김정일은 아마도 김일성을 닮은 정은이면 국민들에게 “환생한 김일성”으로 세일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김정은이 김일성은 아니지만 김일성같이 보이게 할 수는 있다는 확신이다. 북한의 김정은 띄우기는 김정은의 얼굴 위에 김일성을 덧씌워 조손(祖孫)을 동일체로 만드는 연금술이다. 북한의 선전기구들은 김정은을 어릴 적부터의 신동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신동이니 탁월한 지도자가 되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메시지를 발신한다. 실제로 북한 주민들은 텔레비전에 비친 정은의 모습에서 김일성을 보는 행복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중국 수뇌부가 전통적 우의를 대대로 이어가자는 글귀가 적힌 접시형 액자를 김정은에게 선물한 것은 북한을 넘어 지역적인 큰 의미를 갖는다. 중국이 김정일의 누이 김경희와 매제 장성택 같은 일족과 군부의 측근들로 구성된 정은체제의 보호막을 외곽에서 떠받드는 것은 북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중국의 높은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3대 세습에 대한 외부세계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김정일의 북한은 김정은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지금 한국 정부의 입장은 김정은 등장 이후의 북한에 대한 불가지론(不可知論)이다.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대북지원과 남북대화와 6자회담의 재개에 대한 입장 결정을 서두를 수는 없다. 그러나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을 갈망한다는 사실이다. 북한 사정에 밝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5월 북한의 유엔 대표부가 천안함 사건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서한의 초안을 만들어 주미 한국대사관에 전달했다. 그것은 천안함 사건을 이 정도로 마무리 짓자는 북한 방식의 제스처였을 것이다. 천안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부글부글 끓고 있던 그때 한국 정부의 반응은 당연히 부정적이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은 포기하지 않고 제3국에서의 남북한 외교차관급 회동을 제의해 놓은 상태라고 전했다. 북한은 납북 어부들을 돌려보내고 이산가족 상봉을 스스로 제안했다. 건설적인 후속은 없지만 군사회담도 열렸다.

북한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선전효과를 노린 평화공세라기보다는 지난여름 대홍수로 더욱 악화된 주민들의 생활고 해결에 남한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구체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의 북한 지원은 겨우겨우 연명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와 식량에 그친다. 북한이 6자회담의 합의를 어기고 핵개발 재개의 움직임을 보인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은 대부분 끊겼다. 대화재개를 갈망하는 북한에 미국은 한국과 먼저 이야기하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김정일은 남북관계 개선 없이 김정은 후계체제의 연착륙은 불가능함을 인식하는 것 같다. 북한이 예정대로 2012년까지 강성대국을 완성하면 그 공적은 김정은에게 돌릴 것이다. 강성대국의 두 기둥은 핵과 미사일로 무장된 군사력과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 재건이다. 김정은이 “환생한 김일성”이라는 꿈같은 상징조작과 군사력의 증강만으로는 김정은에게 필요한 정통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경제를 살려 국민들을 기아선상에서 구하는 데서 정통성이 나온다. 국민들이 평생소원인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어야 국민들로부터 김정은이 나이는 젊어도 김일성의 손자, 김정일의 아들다운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당 대표자회를 기점으로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모습은 확실히 드러났다. 2002년 남한의 산업시설을 시찰해 남북한 경제력의 격차를 실감했을 장성택이 김정은의 후견인이 된 것은 고무적이다. 그는 새 체제에서 개혁세력을 대표할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의 건강이 더 나빠져 국정장악력을 잃으면 우리에게는 상당 기간 대화의 상대가 없어진다. 김정일의 건강이 저만해 주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내년 중에, 바람직하기로는 내년 상반기 중에 남북한 접촉의 물꼬를 트는 것이 필요하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말대로 북한의 권력세습이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상대하지 않을 수도 없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시아가 요동을 치는 지금 북한이라는 연결고리를 한없이 미해결 상태로 버려둘 수는 없다. 북한 문제는 천안함과 핵과 금강산을 넘어 동북아 격동의 쓰나미에 휩쓸려 들고 있다. 능동적·전략적 대처가 시급하다.

김영희 국제외교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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