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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이민 100년] 下. 우리 가슴에 한국피가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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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 1930년에 찍은 이사벨 김의 환갑잔치 모습이다 (上). 율리세스 박씨가 자신의 자동차 매연검사소 마당 한 귀퉁이에서 재배하는 배추를 살펴보고 있다 (中).멕시코에서는 만 15세가 되면 성인식 파티를 열어준다. 가운데 부채를 든 여자가 성인식 파티의 주인공인 이르마 송(77). 44년에 찍은 이 사진은 1세대의 갖은 고생 덕분에 2세들은 상당히 유복하게 자랐음을 보여준다 (下).

이민 100년을 거치며 5대에 이르는 동안 멕시코 한인 후손의 삶 또한 서로 달라졌다.

멕시코시티의 한인 후손 3세인 루벤 리(46)씨는 한국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진 경우다. 그는 "한국인은 툭하면 소리를 지른다"며 비교적 냉소적이다.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대학을 나온 그의 조카 유누엔 리(24)씨도 한인 후손이라는 생각을 거의 한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치과의사인 어머니가 한국인의 피를 절반이나 받았지만 자식을 처음부터 멕시코 상류사회를 겨냥해 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돌프 김(34)씨는 달랐다. 1991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모국에 온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한인 후손임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또 할아버지에게서 늘 김치 냄새가 났으나 싫지 않았다고 했다. 그 또한 갈비와 고추장을 즐겨 먹으며 아리랑과 사물놀이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생활이 고달픈 한인 후손도 적지 않다.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 사회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한인 후손이 특히 그랬다. 프로그레소항에서 멀지 않은 노칵 마을에서 만난 레네알론소 도(38)씨는 다섯 아이 모두를 초등학교만 마치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자신도 초등학교만 나왔다는 것이다. 반면 한인 4세 리스벳 로이 송(51)씨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그는 이민 여성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킨타나로오주의 대법원장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같은 환경, 비슷한 처지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됐지만 몇 대를 거치며 신분.경제력.생각 등 모든 분야에서 차이가 생겼다. 혼혈이 거듭되면서 일부 후손들은 한국과 멀어지고 조상이 누구인지 관심조차 잃고 있다. 대부분은 '코리안 멕시칸'이 아니라 그냥 멕시칸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순 이들에게 잊혀 가던 조국을 일깨운 사건이 있었다. 한국 해군 함정 세 척이 100년 전 이민선 항로를 따라 멕시코 서남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들어온 것이다. 이때 그저 호기심 차원에서 마중나왔던 한인 후손 200여명은 한국 해군을 보고선 다들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체성을 찾을 계기가 주어지면 한인의 피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여준 경우였다.

한인 후손과의 쉬운 연결고리로 음식이 꼽힌다. 양국 음식에는 매운맛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어릴 적부터 길든 입맛에 따라 후손 대부분은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김치.고추장.된장.콩나물.만두.미역국 등을 알고 있다. 지금도 한인 후손 상당수가 삼일절 등의 기념일엔 함께 모여 한국 음식을 나눠 먹는다.

대가족인 율리세스 박씨의 경우엔 친척들의 김치 수요에 맞추기 위해 유카탄에서 경영하는 자동차검사소의 넓은 마당 한 모퉁이에 밭을 만들어 배추와 무 등을 아예 자신이 직접 재배하고 있다며 웃었다.

르판의 옛 에네켄 농장에서 무지개 한글학교를 7년째 운영하고 있는 다니엘 김(67)전도사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을 통해 빈곤에 시달리는 후손의 삶부터 개선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조규형 주 멕시코 대사도 "젊은 후손을 한국에 데려와 차량 정비 등 직업교육을 시켜주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그런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고 한.멕시코 양국의 우호를 증진시키며 한국과 한인 후손을 잇는 길이라는 것이다.

멕시코시티.프로그레소.메리다 =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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