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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이 사람] 히로히토 ‘유약한 천황’가면에 가린‘냉혹한 군사지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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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지음
오현숙 옮김, 삼인
944쪽, 3만5000원

일본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27일 천황 히로히토가 미 점령군사령관 맥아더와 첫 만남을 가졌다. 서로에게 매우 거북했을 자리, 하지만 둘은 썩 만족했다. 히로히토, 그는 전범(戰犯) 기소와 퇴위 압박이라는 두 악몽을 떨쳐낼 수 있었다. 칼을 쥔 상대가 그럴 뜻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맥아더 역시 우쭐했다. 아라히토가미(現人神), 살아있는 신이라는 천황으로부터 미군 점령시책을 평가 받고, 향후 협조까지 다짐 받은 것이다.

신간 『히로히토 평전』에 등장하는 핵심인물 둘의 대조적인 성격, 분주한 정치 계산 뒤에 숨겨진 얼굴 표정까지 들여다보인다. 그게 전기·평전을 읽는 맛이고, 사람을 통해 역사를 짚어보는 재미인데, 회담의 여파는 실로 컸다. 현대일본의 좌표가 잡혔고, 냉전시대 미·일 동맹의 첫 단추도 사실상 이때 뀄다. 히로히토를 전후 일본 재건의 구심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 아래 몇 달 뒤에 ‘천황의 인간 선언’이 등장한 것도 그 맥락이다.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는 전통 예복을 입고 일본 천황에 즉위했다. 갈색을 띈 황색으로 두껍게 짠 비단 예복에는 황위에만 쓰이는 문양(오동나무·대나무·봉황·기린)이 수놓였다. 관도 천황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삼인출판사 제공]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왔다는 희대의 코미디 직후 미국에서 기다렸다는 듯 박수가 터져 나왔다. NYT는 히로히토야말로 “일본 역사의 위대한 개혁자”라고 호들갑 떨었다. 전범 면제에 이어 개혁군주라는 칭송까지 더해진 순간이다. 명목뿐인 지도자, 그리고 유약한 천황 히로히토란 이미지는 그렇게 만들어졌지만, 『히로히토 평전』은 그 가짜 신화를 벗겨낸 역작이다. 그가 진주만 기습을 포함한 태평양전쟁을 시종 주도했다는 논증이다. 결과는 놀랍다. 군사지도자 히로히토의 숨겨진 그림이 우릴 경악시킨다. 저자는 미국의 역사학자인데, 그가 퓰리처상(2001)을 받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격앙된 비판은 아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아니지만 20세기 일본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즉 문제적 인간으로 설정할 뿐이다. 그게 참 통쾌하다. 히로히토는 지금껏 전쟁 죄과를 공개적으로 인정치 않았는데, 그게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와 직결돼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동시에 이 책의 최대 볼거리는 ‘그 사람’ 히로히토의 성장과정과 내면풍경 묘사다. 일테면 그의 성장과정과 정체성이란 철두철미 메이지 일본의 작품이다.

아버지(요시히토 천황)의 경우 정치적 무능 이전에 몸이 너무 허약했다. 군사지식도 전무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제왕학을 익힌 히로히토는 체계적 교육에서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메이지 천황)보다 한 수 위다. 자유주의 바람에 휘청댔던 황실을 일으켜 세운 건 어쨌거나 그의 공이다. 성장기 내내 무사정신(大和魂)·군인정신을 내면화한 탓이지만, 그건 냉혹한 군사지도자 히로히토의 숨겨진 권력의지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는 소극적 성격이었다. 특유의 하이톤의, 자신 없는 여성적 목소리 때문인지 평생 유달리 과묵했다. 저자는 묻는다. 그건 ‘침묵의 가면’을 쓴 채 웅변적 효과를 노리는 천황가의 노하우였을까, 아니면 호르몬 분비 부족일까? 이 책은 8년 전 선보인 에드워드 베르의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과 시각은 비슷하다. 그러나 좀 더 본격적이어서 ‘평전의 하이엔드(궁극)’라 할만하다. 한 가지 이 책은 일왕(日王) 대신 천황이란 용어를 쓴다. 역사적 인물의 직위이기 때문인데, 리뷰 역시 천황으로 통일했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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