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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183) 되돌아 본 182회 대장정,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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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건국 2년 뒤 참혹한 전쟁에 직면했던 대한민국은 결국 미국 등 우방국의 힘을 빌려 국가의 초석을 강고하게 다졌다. 전쟁과 복구, 그리고 국가의 건설-. 신생 대한민국이 걸어온 1950년대의 숨가빴던 격랑을 생생하게 적는 것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을 연재하는 큰 취지다.

국군의 날을 맞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까지 연재됐던 이야기의 대강과 앞으로 나올 내용을 소개하는 특집판을 마련했다.

1950년 12월 8일 함경남도 장진호 남쪽 고도리에 집결한 미 해병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1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1950년 10월 말에 벌어진 중공군의 개입과 국군 및 연합군의 대처 상황을 집약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6·25가 본격적인 국제전쟁으로 비화하는 순간들을 담았다. 안개처럼 밀려들어 깊고 험준한 적유령 산맥 곳곳에 포진한 뒤 기습과 포위 공격을 반복하는 중공군, 상대의 전략과 전술을 파악하지 못해 당하고 마는 국군과 연합군의 모습을 실었다. 중공군은 50년 12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반전시키고 남쪽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아군은 서울을 내주고 평택까지 밀렸다가 강력한 반격을 펼쳐 전선을 38선까지 회복했다. 1·4 후퇴로 서울을 적에게 다시 내주고 후퇴해야 했던 국군 지휘관의 심정과 중공군의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다시 북진하는 상황을 담았다.

#2 처참했던 6월 25일의 아침 -임진강을 넘어온 적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전쟁이 터졌던 50년 6월 25일의 생생한 기억을 더듬었다. 국군 1사단 사단장으로 전쟁 급보를 전해 듣고 정신 없이 달려간 임진강 전선, 전차라는 낯선 무기를 몰고 내려오는 북한군, 사흘에 걸친 1사단의 분전과 한강 이남으로의 후퇴 상황을 담았다. 왠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북한군의 서울 체류 3일, 수안보까지 내려온 김일성의 전선 지휘, 일방적으로 밀리면서도 끝까지 지연전을 펼쳤던 김홍일 소장의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경기도와 충북, 경북 일대를 전전하면서 지연전을 펼치는 이야기도 담았다.

#3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 낙동강 혈전

대구 북방 20㎞의 다부동.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을 맞아 대한민국의 사활(死活)을 걸고 맞서 싸운 곳이다. 이곳이 뚫리면 대구와 부산의 함락은 그저 시간상의 문제였다. 절박하게 몰아치는 북한군의 공세와 결사적인 항전을 계속했던 국군의 싸움을 그렸다. 피에 젖은 학도병의 편지, 다부동의 유학산과 수암산 등지에서 풀잎처럼 스러져간 국군 장병의 사연들을 소개했다. ‘볼링장 골짜기’라는 곳에서의 국군과 미군의 합동작전, 밀려 내려오는 국군 11연대 장병을 다시 이끌고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면서 ‘사단장 돌격’을 감행했던 백 장군의 일화가 백미(白眉)다.

#4 용감한 반격 - 서울 거쳐 평양으로

50년 9월 15일 펼쳐진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그러나 이를 받쳐줄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미군의 반격은 늦어졌다. 백 장군의 1사단이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진격의 선두는 미군 1기병사단. 국군 1사단은 평양까지의 진격 선두에서 제외됐다.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을 찾아간 백 장군은 간곡한 설득으로 평양 진격을 허락받았다. 밤낮없이 강행군을 펼친 1사단이 미 1기병사단에 앞서 간발의 차로 ‘평양 선두 입성’의 영예를 안았다. 치열하게 펼쳐지는 선두 경쟁에서 보이는 국군 지휘관과 1사단 배속 미군 장교들의 우애, 평양을 앞에 둔 국군 장병의 설레는 심정이 그려져 있다.

#5 국군의 처참한 패배 - 대관령의 중공군

장면은 운산전투와 1·4 후퇴를 거쳐 51년 4월의 강릉과 대관령으로 바뀐다. 강릉 주둔 1군단장으로 부임한 백 장군이 51년 벌어진 중공군의 춘계 2차 공세에 직면한 상황이다. 국군 3군단의 어이없는 ‘현리 전투’ 패배, 중공군의 거침없는 공세, 미군의 번개 같은 기동 등이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다. ‘오마치 고개’를 선점한 중공군의 벼락같은 기습, 패주하는 국군, 백 장군 1군단의 대관령 방어가 펼쳐지면서 마침내 3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중공군 대공세는 수포로 돌아간다.

#6 휴전회담의 시작 - 판문점의 공산주의자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이 시작됐다. 백 장군은 최초의 한국 측 휴전회담 대표로 뽑혔다. 개성에서 벌어진 휴전 회담의 막전막후(幕前幕後). 중공군 대표와 북한군 대표의 기질적인 차이, 냉혹한 면모를 보이는 데 서슴지 않았던 북한 대표 이상조의 인상기 등을 담았다. 휴전을 도모하려는 북한과 중국의 속셈, 이에 대응하는 유엔군과 한국의 미묘한 입장 차이도 담았다.

#7 빨치산을 없애라 - 지리산의 숨은 적들

48년 제주 4·3 폭동,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백 장군이 주도한 군부 내의 좌익 숙군 작업이 전반기의 내용이다. 해방 뒤의 정국에서 펼쳐진 남로당의 활약, 좌익의 군부 침투, 좌익 반란 사건 진압, 그 직후에 펼쳐진 좌익 숙군 작업 등이다. 남로당 군부책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숙군 총 지휘자인 백 장군의 운명적인 만남이 눈길을 끈다. 이어 4개 사단 병력을 동원한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51년 말에 펼친 세계적인 규모의 대게릴라 작전. 그 성공 뒤에 숨은 각급 부대 지휘관의 절절한 애환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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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앞으로 소개할 내용들

백선엽(사진) 장군은 지리산 토벌작전 뒤 국군 2군단 재창설 작업을 지휘하면서 현대전에 필요한 대량의 포병을 양성하고 교육했다. 국군 현대화 작업의 초석이었다. 52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라 국군 건군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53년에는 참모총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미 대통령 면담을 성사시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제안했다. 혁혁한 전공으로 대한민국 최초 별 넷의 대장 자리에 올랐다. 54년에는 동양 최초의 야전군 사령관에 올라 병력 40만을 이끌고 155마일의 휴전선 방어에 나섰다. 대한민국 안보의 근간인 국군의 현대화 작업, 미군과의 협조 속에 이뤄진 눈부신 건군 과정 등을 소개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전격 석방 사건에 얽힌 비화, 한·미 양국 정부가 전쟁 전후 기간 중에 보였던 긴밀한 협조와 갈등 등도 조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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