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슨의 평생 동지, 루게릭 병 걸리고도 백 메고 필드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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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호 14면

브루스 에드워즈(아래)가 톨레도에서 열린 2003 시니어 오픈 경기 대회 도중 톰 왓슨 앞에 앉아 그린의 경사를 확인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캐디이기 이전에 동지로서 신뢰를 받았다. [톨레도 AP=연합뉴스]

“물 앞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나.” 톰 왓슨이 캐디에게 물었다.
“그린 에지까지 235야드에, 핀까지 12야드를 더해 총 247야드입니다.”
왓슨이 캐디를 돌아봤다. 왓슨은 안전하게 레이업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캐디는 그린까지 거리를 불러준 것이다.

골프에 영혼을 불어넣은 캐디 브루스 에드워즈

왓슨은 “잘 못 들었나? 내가 물어본 것은 그린까지가 아니라 워터 헤저드까지의 거리야”고 했다. 캐디는 “네, 들었어요. 여기서 3번 우드를 치면 그린에 올릴 수 있다는 말이에요”라고 답했다. 화가 난 왓슨은 “물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다시 물었다. 캐디는 그 거리를 불러줬다. 그러곤 캐디 백에서 3번 우드와 6번 아이언을 꺼내 땅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1980년대 초반 스파이 글래스힐 골프 코스에서 열린 PGA 투어 AT&T 내셔널 프로암에서 생긴 일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컷탈락 선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왓슨은 파5 홀에서 레이업 하려 했는데 캐디는 물이 무서워 도망가려는 겁쟁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회사 사원이 사장에게 “일 똑바로 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던져버린 것과 진배없었다. 함께 경기하던 아마추어이자 전 USGA 회장인 샌디 테이텀은 캐디를 보고 “용기가 대단하다”고 비꼬았다. 그 캐디는 브루스 에드워즈다. 타이거 우즈의 가방을 메고 다니는 스티브 윌리엄스보다 더 유명한 캐디였다.

에드워즈는 왓슨이 자신을 해고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경기 내내 부진하던 왓슨의 가슴을 뛰게 할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잠시 생각을 한 왓슨은 3번 우드를 집어 들었다. 그는 깨끗이 물을 넘겼지만 버디를 잡지는 못했다. 그래도 에드워즈를 해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드워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간 그와 함께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가슴에 묻었다.

에드워즈는 13세부터 아버지가 회원으로 있는 골프장인 웨더스필드에서 아르바이트로 캐디를 했다. 골프를 좋아하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캐디를 하면 골프에 관심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골프가 아니라 캐디에 관심이 있었다. 그 골프장은 그레이터 하트포드 오픈이 열리는 곳이었다. 60년대 아널드 파머나 잭 니클라우스 등 특급 선수를 제외하곤 전문 투어 캐디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골프장은 전문 캐디가 오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열세 살 소년 에드워즈도 투어 캐디가 될 기회를 얻었다. 선수인 딕 로츠의 가방을 들겠다고 했다. 로츠는 “넌 가방보다 작다”고 했는데 “이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고 우겼다. 로츠는 12위를 했고 캐디피로 60달러를 받았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뒀다. 로츠는 하트포드 오픈에 올 때마다 그에게 가방을 맡겼다. 에드워즈는 고교 시절 PGA 투어 대회 캐디를 하겠다고 집을 나가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치과의사였다. 할아버지도 의사였다. 그는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의 중산층이었고 좋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교 동기 중 그를 제외하고 모두 대학에 갔다. 고교 앨범에 ‘너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투어 대회의 캐디를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부모는 물론 그를 좋아하던 PGA 투어 선수들이 “이건 젊고 똑똑한 네가 할 일이 아니다”고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졸업하자마자 PGA 투어 대회장으로 갔다. 6주 만에 톰 왓슨을 만났다.

에드워즈는 54년생이다. 왓슨보다 다섯 살이 적다. 왓슨도 그를 학교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포기했다. 왓슨은 “에드워즈는 타고난 집시였다”고 회고했다.

본격 투어 캐디를 시작한 73년 에드워즈의 목적은 최고의 캐디가 되는 것이었다. 브루스가 캐디를 시작할 때 40명 정도의 전문 투어 캐디가 있었다. 대부분 흑인이었다. 투어 캐디는 흑인만 일하던 오거스타 내셔널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거스타는 마스터스가 열리는 곳이다. 오거스타 내셔널은 마스터스 후 6개월가량 문을 닫는다. 캐디들은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마스터스에서 가방을 멘 선수들과 마음이 맞으면 다른 대회에도 쫓아다녔다. 그러나 위상은 낮았다. 투어 캐디는 알코올 중독자가 많았고 이류 인생이었다. 대회 때마다 훈련장에서 공을 주워 와야 했는데 매우 위험했다. 잭 니클라우스의 캐디였던 안젤로 아기아는 “잭은 나에게 경기가 잘 안될 때 내가 최고의 골퍼라는 것과, 남은 홀이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역할만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에드워즈는 투어에 나타난 신세대 캐디였다. 그는 옷을 잘 입고 시간을 잘 지켰다. 어떻게 해야 선수가 힘을 내는지도 알았다. 경기 전 코스를 꼼꼼히 살피며 야디지북을 만들었다. 이전까지 캐디는 가방을 드는 사람에 불과했다.

둘이 처음 함께한 대회에서 왓슨은 6위를 했다. 두 선수는 함께 35승을 했다. 골프 팬들은 B급 선수들은 몰라도 왓슨과 함께 많은 우승을 한 에드워즈는 알아봤다. 아쉬움도 있었다. 왓슨의 메이저 8승 중 그가 가방을 든 것은 단 1승뿐이었다. 미국선수들은 영국에서 열리는 오픈 챔피언십에는 비용 때문에 캐디를 데려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왓슨은 현지에서 만난 캐디와 마음이 맞았고 그와 함께 다섯 차례 클래릿 저그를 들었다. 왓슨은 마스터스에서 두 번 우승했는데 오거스타 내셔널은 83년까지 전문 캐디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마스터스 우승은 그 이전이다. 둘이 함께 이룬 메이저 우승은 82년 US오픈이 유일하다.

그러나 둘은 마음 속으로 서로를 믿었다. 왓슨은 퍼팅 입스(공포증)를 겪고 골프에 대한 열정을 잃은 후 에드워즈를 당시 최고 선수였던 그레그 노먼에 보내주기도 했다. 최고의 캐디인 에드워즈가 최고 선수의 가방을 메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노먼과 오랫동안 일하지 못했다. 자신의 책임을 캐디에게 전가하는 선수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골프의 정신을 지키는 진정한 보스가 필요했고 왓슨이 바로 그 사나이였다. 에드워즈는 왓슨에게 돌아와 96년 메모리얼 토너먼트 우승을 도왔다. 99년 라이더컵에서 미국 주장 벤 크렌쇼는 에드워즈를 특별 보좌역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나는 쿼드러플 보기를 했어요.”
2003년 초 에드워즈는 왓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흔히 루게릭 병이라고 부르는 ALS에 걸린 사실을 털어 놨다. 이후에도 그는 무거운 캐디백을 메고 왓슨을 따라다녔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2004년 4월 7일 에드워즈는 벤 호건 상을 받았다. 병이 들거나 신체적으로 핸디캡이 있어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골프인에게 주는 상이다. 그 소식을 들은 지 몇 시간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마스터스 1라운드 티오프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의 부고를 들은 후 왓슨은 이렇게 회고했다. “지난해 마스터스에서 백을 메고 난 후 에드워즈는 주차장에서 통곡을 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마스터스에 다시 오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왓슨은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샷을 했다. 사라졌던 왓슨의 열정은 에드워즈를 기리기 위해 다시 불타올랐다. 지난해 브리티시 오픈에서 60세의 왓슨이 우승 문턱에까지 간 것도 에드워즈 덕분이라고 했다. 왓슨은 “그의 몸은 잃었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 있다. 내 삶은 그의 정신에 의지하곤 한다”고 했다. 2005년 ALS 치료를 위한 브루스 에드워즈 재단이 세워졌다. 물론 왓슨도 큰 힘을 보탰다. 재단은 5년간 300만 달러를 모았다.

필 미켈슨이 프로로 전향한 92년부터 함께 일한 캐디 짐 매케이는 인텔리다. 그는 “에드워즈는 나의 아널드 파머”라고 했다. 에드워즈 덕에 캐디는 인격이 생겼고 투어의 중요한 일부분이 됐다. 매케이나 스티브 윌리엄스는 연 100만 달러(약 11억7000만원) 정도의 돈을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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