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자진사퇴할 시간은 많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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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주지하다시피 주식투자를 하는 펀드는 주식을 사고 나서 가격이 오르면 매각해 이익을 낸다. 이 전략을 보통 ‘월스트리트 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이칸은 다르다. 그는 주식을 사들인 후 곧바로 회사 경영에 개입한다. 유휴자산 매각, 고배당 실시, 자사주 매입 등이 바로 그의 요구사항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재료들은 발표되기만 해도 주가가 오른다. 회사 경영에 적극 개입해 주가를 띄우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전략이 주주행동주의다. 만일 경영진이 소극적일 경우 그는 다른 주주들의 동의를 통해 경영진을 해임하겠다는 ‘위임장 대결’ 카드를 내밀고 이 경우 경영진은 대부분 굴복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압력을 넣어 주가가 오르면 그는 미련 없이 주식을 팔고 떠난다. 그가 올리는 수익은 상당 부분 짭짤하지만 해당 기업은 그로 인해 한바탕 난리를 겪는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도 KT&G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를 ‘황제적 주주’ 혹은 ‘제국주의적 주주’라고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주주행동주의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칼 아이칸만큼 공격적이고 탐욕적이지는 않더라도 연기금 등 펀드 입장에서 보면 주식을 사들인 후 주가가 오르도록 유도한다는 접근은 다분히 매력적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상당 부분 가시화되고 있고, 우리나라 최대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 등의 장치를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이 최근 들어 더욱 강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국민연금은 투자 대상 회사의 주주협의체를 구성해 회사 경영에 관여한다든가, 회사에 직접 사외이사를 파견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연금을 통해 회사 경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심지어 사외이사 임명까지 관여할 수도 있게 된다. 일종의 ‘연금사회주의’다. 그리고 지분이 분산된 금융기관의 경우 이러한 조치는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정부는 지금 금융기관 지배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안도 추진 중이다. 이 법안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사회를 사외이사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이 눈에 띈다. 상근감사를 없애고 감사위원회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한다든가, 집행임원 임명에 이사회가 관여한다든가 하는 방안을 통해 경영진에 대한 강력한 견제장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듯 보이는 주주행동주의의 움직임과 금융기관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조치를 겹쳐 놓고, 사외이사 파견 가능성과 이사회 권한 강화라는 관점을 가지고 상황을 관찰해보면 그림이 묘해진다. 아니 분명해진다. 국민은행 사태가 불씨를 지폈고 신한은행 사태가 기름을 부었다. 이제 정부 개입의 명분은 단단해지고 있고 국회 쪽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일부에서는 은행 경영진 연임 제한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일부 은행의 문제가 빌미가 되어 은행과 금융산업 전반에까지 엄청난 관치(官治)의 후폭풍이 초래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자율’이 안 되니 ‘타율’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에 문제를 초래한 신한은행 경영진은 사법당국과 감독당국에 운명을 맡기지 말고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힘들겠지만 은행 내부를 추스를 수 있는 강력한 방안을 ‘자율’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즉시 용퇴(勇退)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실망한 주주들과 불안해 하는 예금자들을 안심시키고, 금융산업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면서 은행이 다시 힘을 얻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는 은행조직 내지 금융산업에 ‘자율’적 해결 능력이 아직 충분하다는 신호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들을 그동안 키워주고 길러준 은행을 위한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다. 시간은 많지 않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