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선거참모 칼 로브 권력 전면에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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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 칼 로브 정치담당 고문(左)과 함께 지난해 9월 백악관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워싱턴 AP=연합]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막후 권력 실세가 마침내 정치 전면에 나섰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8일 "칼 로브(54) 대통령 정치 담당 고문이 백악관 비서실 차장에 겸직 발령돼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내정책회의.국가경제회의.국토안보회의에서 정책 조정에 참여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그는 "로브가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 중 한 명으로 오랫동안 전략과 정책개발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해 왔다"면서 "이제 역할을 확장할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3일 재선이 확정된 뒤 워싱턴 레이건 빌딩에서 한 연설에서 "우리 선거의 설계사(architect) 칼 로브에게 감사한다"면서 고마움을 표시했었다. 정치인 부시는 1990년대 초까지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 텍사스 주지사로, 대통령으로, 또 아들이 재선에 성공한 첫 부자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게 된 것은 로브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는 게 미 선거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야당인 민주당은 로브의 등장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앞으로의 파급효과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 실세의 등장=로브는 그동안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건물 2층 사무실을 사용해 왔다. 과거 힐러리 여사가 쓰던 방이다. 이제 비서실 차장 발령과 함께 1층 대통령 집무실 근처로 방을 옮긴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동안 로브가 권력을 행사해온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외교정책에 대해선 손을 대지 않았는데, 이젠 외교문제까지 다루게 됐다"고 말했다.

로브가 행사할 사실상의 권력은 70년대 국무장관과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겸직했던 헨리 키신저에 버금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당시 키신저는 외교정책에서 얻은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국내문제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하지만 로브는 선거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부시의 신임을 얻은 뒤 외교정책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일부에선 "로브가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비서실 차장이라는 공식 직함에 등록함으로써 앞으로는 숨가쁘게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관료주의에 빠져 과거와 같은 창의성은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긴장하는 민주당=민주당 테리 매컬리프 전국위원장은 "로브는 진실을 왜곡하고 목적을 위해 더러운 술수를 쓰는 책략가"라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매컬리프는 "그가 경제 전문가나 안보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은 부시 대통령 자신도 알고 있다"면서 "부시가 정책보다는 정치적인 자리 배치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특히 로브가 공공연하게 "공화당 30년 집권의 기반을 닦겠다"고 언급했던 데 대해 경계심을 표시하고 있다.

이번 대선을 통해 로브가 계획한 대로 입법.사법.행정부 장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대통령 재집권, 상하 양원에서의 공화당 승리, 대법원 판사 다수가 공화당 지지'라는 내용이다. 민주당은 특히 동성결혼 금지, 낙태 반대, 사회보장제도 개혁 등 부시의 대선공약 대부분이 로브의 작품인 것으로 보고 있다.

◆ 성장 배경과 성향=그의 인생사에는 우여곡절이 많다. 어머니는 그가 청소년일 때 자살했고,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다고 한다. 로브 본인도 이혼했다. 69년 유타대학을 다니다 공화당 대학생회에 가입했다. 공화당 대학생 전국위원장을 지낼 때 아버지 부시를 알게 돼 부시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선거에 개입하면 언제나 흑색선전 시비가 생긴다는 게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로브가 법적으로 문제가 됐던 적은 없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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