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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6·25 때도 거르지 않고 89년 이어온 추석 축구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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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대회가 열리기 몇 달 전부터 모여 밤낮없이 연습하곤 했죠. 민족의 한을 달래기도 했고 주민들의 단합과 협력을 다지기도 했지요.”

추석인 22일부터 이틀간 광주광역시 북구 양산동 KT&G 광주제조창 운동장에서 열리는 ‘지산지역 한마당 축구대회’를 준비하는 이병석 대회장은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올해 89회째인 축구대회에 혹여 차질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축구대회를 위해 동창생 40여 명을 중심으로 준비 팀을 꾸린 게 8월 초부터다. 마을을 돌며 되도록 많은 팀이 출전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경기운영 방식과 대진표 추첨, 경기장·심판진 교섭에서부터 대회 당일 경품과 먹을거리까지 준비했다.

매년 추석에 열리는 지산지역 주민 축구대회가 올해로 89회째를 맞는다. 1932년 우승기를 앞에 두고 출전 선수와 임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사진 위). 지난해 추석 연휴기간에 열린 주민 축구대회에 참석한 지산면 주민과 출향인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지산초교 동창회 제공]

광산군 지산면은 1957년 광주시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전남에서 가장 큰 면이었다. 이곳에선 1921년 지산면민 체육대회를 시발점으로 매년 추석 명절이면 주민 축구대회가 열리는 전통이 89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는 경평(서울과 평양) 축구대회보다 8년이 빠른 것으로, 6·25 때도 전쟁을 피해 열릴 정도로 전통이 있다. ‘지산면 축구대회’는 1932년 대회 때부터 자료가 남아 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추석과 축구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주민들이 모두 모여 마을잔치를 여는 추석은 농촌에서 가장 큰 명절이었다. 또 당시엔 조선 사람들의 모임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친선 축구대회는 가능했다. 도촌마을에 사는 김찬영(57)씨는 “어른들로부터 ‘고향 사람들끼리 추석 한나절을 뛰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곤 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워낙 경쟁이 치열해 30년 전까지만 해도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전했다. 이 지역 출신인 정환담 전남대(법학과) 명예교수는 “우승한 마을의 청년들은 영웅 같은 명예를 누렸고 축구 시합은 마을의 단합을 과시하는 경쟁장이었다”고 했다.

지역사회 결속을 이끌어 왔던 축구는 현재 고향과 고향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고향을 찾은 이들은 축구대회를 위해 성묘를 마친 뒤 곧바로 운동장으로 달려온다. 통상 서울과 대전·울산 지역 등에서 성묘를 온 출향인까지 500여 명이 참여한다. 많을 땐 23∼24개 팀이 참가했지만 최근엔 17개 팀으로 줄었다.

오랜 만에 친구와 선후배를 만나다 보니 축구장은 금세 사랑방으로 변한다. 상대를 이기기 위한 축구경기가 아닌 한가위 마을잔치인 셈이다. 고향사람들에 대한 안부와 함께 준비해 간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과거엔 우승 상품과 주민 경품으로 돼지와 예초기·삽 등이 주어졌다. 최근엔 축구대회에 참여한 각 마을에 돼지 한 마리 값을 준다. 고령화로 마을에 돼지를 잡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유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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