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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2) 토벌 사령관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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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전선이 요동을 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늘 움직이는 게릴라를 토벌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빨치산의 도주로를 미리 예상하고 신속하게 부대를 이동시키면서 모든 물자를 어김없이 전선에 보내야 했다. 긴밀하게 통신을 유지하면서 재빠르게 숨거나 달아나는 적들의 뒤를 바짝 쫓아야 했다.

당시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내 숙소는 남원국민학교(초등학교)에 마련됐다. 과거 사단과 군단장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역시 학교 숙직실을 빌려 썼다. 작전 지시를 모두 끝내고 취침한 뒤 오전 5~6시쯤에 일어났다. 그때는 이미 겨울에 접어든 시점이라 일어나면 사방이 여전히 컴컴하기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먼저 찾는 곳은 브리핑실이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를 이끌고 빨치산 토벌을 펼친 백선엽 장군에게 미 정부가 ‘에어 메달’(맨 왼쪽 사진)과 함께 수여한 표창장이다. 피격 위험이 있는 적 상공으로 들어가 작전을 20회 이상 펼친 사람에게 주어진다. 백 장군은 1951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적진 비행에 나선 것으로 적혀 있다. 백 장군은 토벌을 시작하면서 매일 오전과 오 후에 한 차례씩 L19 세스나 경비행기를 타고 작전을 지휘했다. 에어 메달 수상자로는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걸프전을 이끈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해군 조종사 출신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등이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전날의 전적(戰績)을 챙기고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혼자 아침을 먹은 뒤 오전 8시에는 브리핑에 들어갔다. 내가 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고 사령부 참모들이 나의 왼쪽, 미군 고문관들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브리핑실 맨 앞, 말하자면 내 정면의 벽에는 지리산과 그 주변 지역을 상세하게 그린 5만분의 1 지도가 걸려 있었다. 브리핑은 그날 새벽까지의 적정(敵情), 토벌대의 작전 상황, 전과(戰果)가 있는지를 각 담당자들이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기상과 보급관계를 확인하는 순서였다. 브리핑실에는 대개 50명 정도가 들어왔다. 참모와 미 고문관 외에 공중 연락장교, 각급 부대의 연락관이 모두 들어오기 때문이다. 브리핑은 대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보통 오전 9시 정도에는 끝났다.

브리핑이 끝나면 나는 바로 광한루 요천 변에 마련한 간이 비행장으로 가서 L19에 올라타 작전 지역을 둘러봤다. 나중에 미 공군이 내게 메달을 하나 수여했다. ‘에어 메달(Air Medal)’이라는 것으로, 적의 사격 범위에 들어 있는 상공을 20회 이상 비행한 사람에게 주는 메달이었다.

그들은 적의 상공에 진입해 비행하는 것을 ‘언더 에너미 파이어(under enemy fire)’라고 불렀다. 적의 사격으로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공임에도 용감하게 비행에 나서는 사람을 포상하는 제도였다. 토벌대를 총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지만 나는 사령부에 붙어 앉아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상공을 날았던 것은 나름대로 작전 상황을 꼼꼼하게 챙기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나중에 내 비행 기록을 꼼꼼히 적었던 미 공군 조종사가 본국에 기록을 제출해 내가 메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확하게 비행 횟수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적이 있는 상공으로 40여 회 비행을 했다.

수도사단과 8사단의 사단장들도 나처럼 비행기에 올라타고 작전을 지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들 2개의 정규 사단과 1개 사단 규모의 예비 부대, 전투경찰 3개 연대를 통솔해 지휘하는 사령관이었다. 챙겨야 할 사항이 사단장이나 각 연대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자주 ‘현장’을 챙겼다. 적과 교전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멀다 하지 않고 그 현장을 찾아다녔다. 남원에 있는 사령부에서 수도사단 지휘부가 있는 구례를 자주 방문했고, 같은 남원에 지휘소를 둔 8사단에도 자주 들렀다. 각 사단의 예하 연대도 내가 단골로 찾는 방문지였다.

야전전투사령부의 사령관이 현장을 들르는 것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수시로 현장을 방문해 작전 상황을 점검하면 각급 부대의 지휘관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작전 상황을 들어보고 제대로 작전이 펼쳐진 경우라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육로로 이동할 때에는 지프를 이용했는데, 뒷좌석에는 부관과 무전병이 함께 탔다. 수시로 전황을 챙기고, 교전 상황이 벌어진 곳의 정보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전에서 성과를 올린 부대에는 직접 전화를 하거나 무선으로 통신을 했다. 작전 지휘관을 불러 “임무 잘 수행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꼭 전했다.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전투를 훌륭하게 치른 경찰 부대장에게도 반드시 칭찬을 했다.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제법 오랜 기간 작전을 펼치는 아군 부대원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보급 상황은 상당히 좋았다. 빨치산 토벌 속보가 전국에 전해지면서 서울이나 대도시의 명사(冥뵨)들이 부대를 방문해 성금을 기탁하거나, 대량의 위문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산 속에 오래 들어가 있는 작전 부대원들은 물자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건빵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런 부대가 작전을 마치고 나오면 충분한 위문품을 보내 고생을 위로했다.

그렇게 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의 토벌작전은 대게릴라전으로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고 자부한다. 우리의 작전은 세계적인 규범이 될 만했다. 마구잡이 사살을 자제하고 선무공작을 최대한 펼쳐 빨치산을 생포하는 데 주력했다. 주민들에게도 가능한 한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했다. 성과가 가시화하면서 이 작전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아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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