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수술로 쥐가 된 ‘로엔그린’의 병사들...권력에 통제 당하는 미래인의 모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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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02면

1 ‘로엔그린’에서 뇌수술을 받고 쥐로 변한 병사들. 맨 왼쪽 나비넥타이를 한 람이 왕의 전령 역을 맡은 사무엘 윤이다. [로이터=연합]

필자는 8월 5일부터 7일까지 한국 바그너 협회 회원들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참관했다. 올해 새로운 버전을 선보인 ‘로엔그린’ 을 비롯해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파르지팔’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 총 30회 공연됐다. 이 중 ‘니벨룽의 반지’를 제외한 세 작품을 사흘간 연속해서 보았다. 세 작품 모두 고전적인 바그너가 아닌, 연출자의 새로운 해석이 가미된 작품이었다. 게다가 ‘파르지팔’에서는 연광철 교수가 은퇴한 노기사 구르네만츠 역을, ‘로엔그린’에서는 사무엘 윤이 왕의 전령 역을 맡아 특별한 감동을 선사했다.

7월 25일~ 8월 28일까지 열린 99회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 가보니

카타리나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Die Meistersinger von N<00FC>rnberg)’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적 악극인 이 작품은 원래 16세기 뉘른베르크에 사는 장인(마이스터)들의 노래 경연 이야기다. 하지만 바그너의 증손녀인 카타리나 바그너는 2007년 이 작품을 제작·연출하면서 시대를 현재로 바꿨다. 주인공 발터 폰 슈톨칭은 한 지방의 귀족이 아니라 음악과 미술 그리고 낙서를 좋아하는 히피 같은 말썽꾸러기 청년으로 탈바꿈했다. 원작에서 구두장인이었던 한스 작스는 타자기로 글을 쓰는 시인이 됐다.

2 오페라 ‘로엔그린’의 무대. [로이터=연합]

중년의 작스를 좋아하는 젊고 아름다운 에바는 그를 성적으로 유혹해보기도 하지만(2막에서는 옷을 벗고 등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양심을 대표하는 신사 작스는 에바를 젊은 발터에게 양보한다. 보수적인 예술인들도 시대를 앞서가는 젊은 예술가 발터를 받아들이고 발터 역시 예술인들의 세계에 적응하면서 에바를 아내로 맞는다. 증조할아버지의 중세 시대 음악과 연극을 오늘의 현실로 해석한 카타리나 바그너의 실험은 비교적 성공한 것 같다. 카타리나의 아버지인 볼프강 바그너가 1984년 제작한 DVD와 2001년 메트로폴리탄이 제작한 DVD는 모두 중세를 배경으로 한 전통적 작품인데, 내겐 카타리나의 현대판이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이번 무대의 지휘는 독일 오페라 지휘 전문가인 세바스티안 와이글이 맡았다.

한스 노이엔펠스의 ‘로엔그린(Lohengrin)’
이 오페라는 중세 유럽에 널리 알려진 ‘백조의 기사’ 이야기다. 힘들게 살고 있는 소녀 앞에 어느 날 소녀가 평소 꿈꾸던 모습 그대로의 기사가 백조를 타고 나타난다는 내용. 작품 속 ‘결혼행진곡’은 너무도 유명하다. 바그너와 루트비히 2세가 인연을 맺도록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15살 황태자 때 이 오페라를 보고 완전히 빠져버린 루트비히는 이후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자 후원자가 됐다. 이번 ‘로엔그린’의 연출은 영화제작자, 연극제작자, 오페라 감독, 시인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한스 노이엔펠스(69)가 맡았다. 이 작품으로 바이로이트에 데뷔한 그는 유럽 문화계에서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의 도발적 작품들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례로 1980년 ‘아이다’에서는 에티오피아 노예들을 현대의 화장실 청소부로 묘사했다. 노골적 성적 노출도 심심치 않게 화제가 됐다.

3 ‘로엔그린’ 리허설 중인 독일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그는 독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로이터=연합]

그의 2010년 판 ‘로엔그린’ 역시 독특했다. 병사(합창단) 전원은 뇌수술을 받아 쥐로 변한 인간이다. 뇌수술을 받는 장면이 무성영화처럼 상영됐다. 왜 병사들을 쥐로 표현했을까. 그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왕의 의사를 전달하는 전령(傳令) 역할을 맡아 중후한 목소리로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사무엘 윤(윤태현)씨도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게다가 가수들은 영상물의 내용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영상물이 노래에 방해될 수 있다며 보지 못하도록 설치돼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공연을 보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떠올랐다. 우리는 수술이나 약물로 인간의 사고나 행동까지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됐다. 아마도 감독은 미래의 어떤 독재자가 인간의 사상과 행동까지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관객 각자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연출이야말로 바이로이트가 매년 관람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비결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연출은 새로운 오페라가 탄생하는 것과 같으며 팬들은 새로운 작품을 원하기 때문이다.

올해 바이로이트 ‘로엔그린’에는 독일의 가장 인기 있는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처음 등장해 화제가 됐다. 69년생인 카우프만은 켄트 나가노의 지휘로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에서 로엔그린 역을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한동안 좋은 테너가 없었던 독일에서 세계적인 테너로 부상하고 있다. 그의 미성과 가창력은 물론 젊은 미남의 연기력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스테판 헤르하임의 ‘파르지팔(Parzifal)’
이 작품은 예수님이 창으로 찔렸을 때 흐른 피를 담은 성배를 지키고 있는 기사단의 이야기다. 파르지팔이 성배의 수호자가 되는데 그는 로엔그린의 아버지다. 이번 무대는 노르웨이 태생의 독일 연출가 스테판 헤르하임(40)이 2008년 바이로이트에서 선보인 버전이다. 그동안 바이로이트에서 반유대주의는 전적으로 금지된 터부였지만, 오슬로 출신의 이 연출자는 나치 독일의 과거를 연상시키려는 듯 마녀를 과감하게 유대인으로 묘사했다. 2차 대전 후 독일의 패전을 배경 삼은 무대에서 병실 치료 중인 패잔병들이 집단 성행위를 벌이는 장면도 나온다. 이를 지휘하는 것은 마법사 클링조르인데, 연출가는 클링조르를 히틀러 같은 악인으로 상징하는 듯했다. 그리고 3막에 이르러 파르지팔이 마법사로부터 되찾은 성창을 들고 나와 왕의 상처를 치유해 줌으로써 왕이 구원을 받는다. 독일이 어두운 과거로부터 구원받고 새로운 시대를 맞는 것이다.

사실 구원은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그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1843), ‘탄호이저’(1845), ‘로엔그린’(1850)을 발표하고 독일의 중요한 작곡가가 되었는데 이들 작품에서 모두 저주받은 주인공들이 구원을 받는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바그너는 근본적으로 인간세계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며 구원을 통해서만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파르지팔’에서도 바보같이 순진한 자만이 이 더러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바그너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종말이 가까워질 때 영혼의 구원을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 심한 협심증에 시달리며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죽기 1년 전 ‘파르지팔’을 완성했다. 많은 작곡가가 자신의 장례식을 위해 장송곡(requiem)을 남기는 것처럼, 바그너는 이 작품을 자신의 장송극으로 쓴 것 같다. ‘파르지팔’에 오페라나 악극이란 타이틀 대신 ‘무대신성축전극’이란 특이한 이름을 붙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이 작품에서 종교적 자세를 견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악극에서 파르지팔은 바그너가 지향하는 이상적 자아(super-ego)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받고 잘못 가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는 데 힘을 보태보겠다는 것이 바그너의 마지막 꿈이자 희망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음기로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여러 잡지에 음악칼럼을 쓰고 있으며 저서로 『음악과 와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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