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을 축하하며 나라를 판 우리 위정자와 일본 침략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앞줄 중앙이 고종 황제, 오른쪽이 순종, 왼쪽은 영친왕, 그 옆이 데라우치 통감이다. (출처:『한일병합사 : 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 눈빛, 2009)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대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되어 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 ‘홍범(洪範) 14조’(1895)가 말하는 ‘자주 독립’은 청일전쟁에 진 중국이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줄다리기에서 물러난 것을 의미할 뿐이요, ‘대한국 국제(國制)’(1899)가 자랑하는 ‘자주 독립의 제국’도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니시·로젠 협정의 산물일 뿐이었다. 우리 위정자들이 소리 높여 외친 ‘자주’의 이면에는 외세의 어두운 손길이 꿈틀거렸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성난 파도와 함께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동아시아에 몰아친 그때 우리는 ‘시간의 경쟁’에서 졌다. 줄타기로 살아남으려 했던 위정자들은 참담한 좌절을 맛보았으며, 일본은 우리를 희생양 삼아 ‘성공’의 역사를 썼다.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일한병합조약’ 제1조). 자각한 주체로서의 국민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황제의 백성들은 속수무책 나라를 앗기고 말았다. 이 땅의 사람들이 미래에 올 나라의 주인 되기를 꿈꾼 3·1 운동 이후 황제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으며, 특권신분을 지칭하던 양반이란 말은 제3인칭 대명사로 전락했다. 풀뿌리 시민사회를 이룬 오늘. 1910년 8월 29일. 역사에서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뼈아픈 국치(國恥)의 날을 맞아 어윤중의 예언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를 맞아 한 세기 전 그때의 참담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외세에 돌려 우리 몫의 책임 찾기를 회피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치욕의 역사를 적을지도 모른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