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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전공 묻지마" 거센 司試열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서울대 공대에 재학 중인 鄭모(24)씨는 졸업하기 전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3학기째 9학점씩만 수강하며 졸업을 늦추고 있다.

鄭씨는 "2년 전 한 학기에 전공필수 18학점을 몰아 수강하고 나머지 학기는 '건강관리''문학개론' 같은 교양과목 위주로 시간표를 짰다"면서 "공대의 경우 실험이나 과제물이 많아 도저히 학업과 사시 준비를 병행할 수 없어 이런 방식으로 졸업을 늦추는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사법시험 합격자의 정원이 1천명으로 늘면서 전국 대학 캠퍼스에 사시 준비 열풍이 더욱 거세게 불고 있다. 1995년까지 3백명이던 사시 정원은 96년 5백명으로 증가한 뒤 지난해까지 매년 평균 1백명씩 늘어왔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 법대생과 비법대생 합격자의 비율이 비슷하게 나오는 등 인문·사회·이공계 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학생들이 너도나도 사시에 매달림에 따라 다른 전공의 공동화(空洞化)가 우려된다.

서울대에 따르면 최근 발표된 제44회 사시 2차 합격자 9백99명 중 서울대 출신이 3백33명이었고, 이 가운데 1백56명(47%)이 비법대 출신이었다. 이 학교의 사회대·인문대·공대·농생대·자연대 등 비법대 출신 합격자 비율은 2000년 37%, 지난해 42%였다.

사시 준비 열풍이 서울대 전 학과로 퍼지면서 이공계 및 기초학문 분야가 급격히 활기를 잃고 있다. 재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사시 준비를 시작하는 2학기의 휴학생을 보면 올해 ▶공대 3백80명▶사회대 1백75명▶농생대 1백70명▶인문대 1백24명▶자연대 1백16명 등이었다. 서울대본부의 한 관계자는 "군 입대·재시험·유학 등 여러 휴학 사유가 있지만 주이유는 사법시험·행정고시 준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대학도 사정은 비슷하다. 연세대의 경우 올해 사시 2차 합격자 1백18명 중 35%인 41명이 비법대 출신이었다.

연세대 법대의 경우 사시 필수과목인 민법총칙·헌법 등의 수강 신청에 비법대생들이 대거 몰리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올해 2학기 민법총칙 과목의 경우 강좌당 2백명씩 세 강좌나 개설했지만 수강 신청 첫날 몇시간 만에 신청이 마감됐을 정도다.

한때 사시 준비반 입실 기준을 법대생으로 한정했던 일부 학교들은 이런 현실을 인정, 전공에 관계없이 시험을 거쳐 사시 준비생을 뽑고 있다. 고려대의 경우 지난 5월 사시 1차시험 후 자리가 빈 사시반 2백여석을 채우기 위해 치른 입실 시험에서 4백명의 응시자 중 3분의 1이 비법대생이었다.

특히 2006년부터 비법대생들이 사시에 응시하기 위해선 법학 과목을 35학점 이상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기 때문에 비법대 전공 수업은 더욱 파행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대 인문학부장인 이한구(철학과)교수는 "저마다 사법시험을 통과해 판사·검사·변호사가 되겠다는 현재 풍토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기초학문 보호를 위해서라도 법조 인력 충원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용환·남궁욱 기자

good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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