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⑦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덧칠한 이미지, 신선한 상상력
시 - 송재학 ‘구름장’ 외 36편

송재학 시인은 “시를 쓸 땐 한 사물이 가진 함축된 이야기를 가능한 많이 끌어내려고 애쓴다”고 했다. [공정식 프리랜서]

이런 시는 뻔뻔하다. 어떤 서사나 진술도 없다. 다만 온갖 이미지들이 엉겨 붙어 있다. 영 난해한 시에 독자는 난감하다. 이럴 땐 선택해야 한다. 시집을 덮거나 파고 들거나. 송재학 시인의 생소한 미학은 이런 선택을 요구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독자적인 문법을 익혀야” 그의 시에서 놀 수 있다. 그렇다고 지레 시를 덮진 말자. 그의 문법을 따르는 이미지의 놀이가 퍽 매혹적이다. 그러므로 남는 건 송재학의 문법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송재학 독해법’이다.

먼저 그의 독특한 이미지 사용법이다.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의 시를 구구절절 풀지 말 것. 마치 그림을 보듯 감상할 것. 한데 그 그림이 모호하다. 맑은 수채화가 아니라 짙은 유채화를 닮았다. 사물을 매개로 내면을 묘사하는데, 그 이미지가 중층적이어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인도 그걸 안다.

“나는 시를 진술하지 않고 묘사한다. 단어가 아니라 문장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편이다. 하나의 대상에 다층적인 이미지가 덧칠돼 있다.”

이를테면 시 ‘구름장(葬)’에서 시인은 낮달을 ‘씻긴 뼈, 해서체 삐침, 탁본 흉터’ 같은 다양한 이미지로 변주한다. 그러면서 낮달이 구름 속에서 풍장을 치르는 것으로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구름 속에서 낮달이 씻기는 건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낮달을 문명으로 이해한 시인은 이 정화의 이미지를 통해 낮달을 인간에게로 바짝 끌어 당긴다.

시어도 독해의 단서다. 그의 시에선 뼈·모래·구름·물 같은 시어들이 자주 출몰한다. 죄다 인간과 자연의 근본인 물질이다. 그는 “시원의 존재로부터 내 존재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긴 그는 고전적·시원적 대상으로부터 스스로의 내면 풍경을 길어내곤 했다. 예심 심사위원들이 “재래적인 상상력을 신선하게 느껴지게 한다”(홍용희)고 말하는 이유다.

그는 엉덩이로 쓰는 시인이다. 책상에 붙어서 일주일에 한 편 꼴로 시를 짓는다. 이따금 독서실에서도 쓴다. 시집 말곤 다른 책을 멀리 한다. “시가 아닌 쪽으로 관심이 흩어질까 두려워서”란다. 참 지독한, 그래서 아름다운 시인이다.

글=정강현 기자
사진=공정식 프리랜서

구름葬

낮달이 구름 속에서 머리 내밀 때마다 궁금한 배후, 씻긴 뼈 같은, 해서체 삐침 같은, 벼린 낫의 날 같은, 탁본 흉터 같은 것이 새털구름을 징검징검 뛰어 눈 속을 후비고 들어왔을 때, 낮달과 내 눈동자의 뒤쪽까지 궁금하다 풍장이란 신열 앓는 구름 속 잡사이거니 했기에 아주 맑은 정강이 뼈 한 줌이 자꾸자꾸 풍화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도 낮달과 내 눈동자의 뒤를 하염없이 따라가고 싶었다 너무 시리거나 너무 여리거나 하여 바람벽에 못질하여 걸 수 없으니 내 눈 속을 비집고 들어온 낮달이다 봄부터 시름시름 앓는 내 백내장의 侵蝕(침식)을 돕던 낮달 조각은 다시 구름 걷힌 서쪽 하늘 전체를 차지해 해말간 몸을 또 씻어내고 있다 저게 맑은 눈물의 일이거니 했다


◆송재학=1955년 경북 영천 출생. 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김달진문학상·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시집 『얼음시집』 『진흙얼굴』 등.



노인, 영화 보다가 세월을 더듬다
소설 - 윤성희 ‘공기 없는 밤’

소설가 윤성희씨는 “뻔히 보이는 비극적인 삶을 희극적으로 바라보는 인물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소설을 읽다 보면 탐정이 된다. 작가가 꽁꽁 숨긴 단서를 찾아내야 재미있게 읽힌다. 물론 이런 소설도 있다. 곳곳에 단서가 훤히 드러나 있다. 심지어 문장도 간결하다. 탐정이 된 독자로선 시시해 보일 수 있다. 말하자면 심히 허술한 범인이다. 흔적은 다 내놓고 잡아보라는 식이다.

소설가 윤성희씨는 허술한 쪽이다. 이른바 ‘윤성희 공식’이란 게 있다. 내용은 이렇다. 지지리 궁상인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이 황당한 일에 휩싸인다. 그런데도 웃는다. 비극적인 삶을 희극적으로 넘긴다. 형식적으론 강력한 유머가 동력이다. 곳곳에서 우스개가 출몰하는 통에 내내 웃음이 터진다. 킥킥 웃으며 읽었는데도 가슴 한 켠이 묵직해진다. 그게 윤성희 소설의 매력이다.

한데 후보작 ‘공기 없는 밤’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윤성희 공식’의 개정 조짐이 엿보여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일흔셋 김영희 할아버지다. 열다섯에 가출해 자수성가 했지만 끝내 망한 인물이다. 또 다시 지지리 궁상의 출현. 여기까지는 공식에 얼추 맞다. 이 할아버지가 ‘영화 오래보기 대회’에 도전한다. 이해할 수 없는 필름을 보며 할아버지는 지난 세월을 더듬는다. 불쑥 아들이 생긴 일, 그 아들의 추락사, 사업의 성공과 실패 등 한 노인의 기억이 영화 장면과 교차되며 서술된다.

여기서 공식에 균열이 인다. 회상은 “윤성희 소설에선 낯설거나 새로운 형식(이수형 예심위원)”이다. 게다가 이 회상은 불친절하게 흩어져 있다. 노인의 기억은 죄다 파편으로만 존재한다. 특정 영화 장면에서 불쑥 어떤 기억이 솟는 식이다. 문장도 영화와 노인의 기억이 뒤엉켜 있다. 김미현 예심위원은 “가장 비영화적인 인물이 가장 영화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형식이 리얼하다”고 말했다.

전작에 비하면 유머도 헐렁해졌다. 영화 속 이야기에선 윤성희식 유머가 설핏 보이지만, 빵 터지는 대목은 덜하다. 작가의 일차 해명은 이렇다.

“노인 혼자 기억을 더듬는 이야기다 보니 유머 포인트를 살리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거듭 그의 설명이다.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서술할까 늘 고민한다. 예전엔 문장이나 문단 내에서 뜬금 없는 유머를 생산했다면, 최근엔 플롯의 전체 흐름을 통해 유머를 드러내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러니까 ‘공기 없는 밤’은 그 모색의 출발점이다. 윤씨는 “기억을 토막 내는 작업에 관심이 생기면서 서술 방식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새로운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면서도 유머의 강도를 지킬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윤성희 특유의 사랑스런 캐릭터들은? 작가의 말이다. “결국엔 제 뜻대로 안 되는 어설픈 인간들, 그런 지질한 인간들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겠다.” 그러니 탐정이 된 독자들이여, 다행이다. 앞으로도 ‘윤성희 공식’이 전면 개정될 일은 없겠다.

글=정강현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윤성희=1973년 경기 수원 출생. 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문학상·이수문학상 등 수상.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